옳은 것과 그른 것 도덕적 절대성의 본보기(46호)

작성자
한국오늘의양식사
작성일
2017-11-12 15:42
조회
6243

발간사


우리나라에는 1500년 동안 불교와 유교의 가치관과 윤리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과거의 체계들이 무너지고 새로운 가치관이 형성되지 못한 가운데 개인과 공공윤리가 사라진 사회가 되어 사사기 시대처럼 "각자 자기 소견대로" 행동하는 윤리적 무정부 상태가 되었습니다.

대통령에서부터 일반 시민에 이르기까지 들키지 않으며 재주껏 사리사욕을 채워 가는 시대입니다. 특히 나라의 최고 지도자들을 인준하는 청문회에 출석한 후보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위장전입을 비롯한 각종 불법 행위를 통해 이득을 보며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 속속 밝혀졌습니다. 그나마 있던 전통적 가치관과 윤리관이 다 사라지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알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옳은 것을 그르다고 하고 그른 것을 옳다고 하는 시대가 온다고 한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이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옳고 그름을 정말 구분할 수 없나요? 절대자 하나님이 계시다면 절대적 가치관이 있는 것이 당연하고 그 절대적 가치관을 어기거나 버리면 그에 해당하는 파괴와 혼란과 고통이 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번 신앙성장 시리즈 책자는 이런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읽고 나서 그냥 두지 마시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셔서 그분들도 함께 새로워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2017년 7월

김상복 목사

 

서문


우리는 “문화전쟁”이라 불리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도덕적 기조에 대한 공감대를 상실했기 때문에 우리는 법정에서, 기표소에서,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 우리를 갈라지게 만든 어려운 도덕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기를 쓰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린 결론은 관용, 열린 마음, 그리고 존중이 답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우리 형제들의 보호자”가 되어야 하는 때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지녔던 도덕적 가치관을 포기하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 동성애,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생명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성경이 이러한 어려운 문제에 대해 심오한 통찰력을 우리에게 준다고 믿으며, 알비씨의 원로 연구편집자 허브 반더 러그트의 매우 소중한 도움을 받아서 우리는 이 책자를 도덕적 절대성에 대한 사례로써 여러분께 드립니다.

마틴 디 한 2세


우리 마음의 도덕적 상태


1903년 마크 트웨인은 ‘새로운 범죄’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부유한 범죄자들이 정신이상이라는 이유로 무죄 평결을 받는 일련의 살인 사건들을 다루었습니다. 책의 결론은 “정신이상은 확실히 세계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범죄는 자취를 감추고 있습니다. 더 이상 살인이라고 언급할 만한 것은 어쨌든 없습니다. 이전에는 만약 당신이 사람을 죽였다면 당신은 정신이상자가 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을 죽여도 돈이 있고 친구가 있다면 그것들이 바로 ‘당신에게 책임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트웨인의 이 비아냥거리는 이야기는 작금의 우리의 법체계의 딜레마를 생각나게 합니다. 만약 도덕적 책임감이 부분적으로나마 마음속에 있었다면 치정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법적인 책임이 있다고 누가 말 할 수 있을까요? 만약 범죄자가 여러 해에 걸친 학대와 정서적 트라우마로 인해 “정신이상”상태였던 희생자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원하는 것은 범죄에 대처하기 위한 법률이 아니라 정신이상에 대처하기 위한 법률입니다. 진짜 악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 있습니다.” 마크 트웨인




그런데 오늘날의 법체계는 더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만약 도덕성 자체가 마음의 상태라면, 그리고 도덕적 품위의 기준에 대한 어떤 사회적 공감대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해마다 바뀌는 정치적 다수자들이 일으키는 변화의 바람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 무엇으로 우리를 지켜야 하겠습니까? 가치관이 요동치는 바다에서 어떻게 우리가 생존할 수 있겠습니까?

신문 컬럼니스트 찰리 리즈는 플로리다 주에서는 여성이 낙태를 하려고 낙태시술자를 고용할 수는 있지만 만약 임신 중에 마약을 먹으면 “아동학대”로 고발당하고, 같은 주의 어떤 학교에서는 양호교사가 부모의 동의서 없이는 학생에게 아스피린을 줄 수 없지만, 임신한 학생이 부모에게 알리지 않고도 낙태수술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이러한 모순은 공통된 도덕관점이 상실된 민주주의에서는 쉽게 해결될 수 없습니다. 미국여성연합회 회원들에게는 상식처럼 보이는 일이 보수 기독교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의 모든 규칙들이 단지 관점의 문제일까요? 아동 성추행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던 사람이 그가 선택한 직업이기 때문에 어린이집에서 일할 권리가 있을까요?

동거 중인 커플들이 서로 사랑하며 피임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성관계를 갖는 것이 정당화될까요? 아내와의 관계가 너무 불행하거나 두 사람이 더 이상 서로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고 느끼면 남편에게 결혼서약을 깰 윤리적 권리가 있습니까?




위가 아래가 될 수 있고 안이 바깥이 될 수 있고, 오른쪽이 왼쪽이 될 수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환경과 관점에 달려 있습니다.




고등교육이 여기에 대한 답을 주지 않습니다. 척 콜슨은 하버드 대학에서 3주간의 직업윤리 과정을 마치고 돌아온 친구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그는 지도교수가 윤리체계를 한 문장으로 축약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신문에 나게 될 것 같으면 어떤 일이든 절대로 하지마라“. ‘기드온의 횃불’이라는 소설에서 콜슨은 그런 생각의 철학적 배경을 상원 법사위 공직자인준청문회 장면에 담았습니다. 바이런 랭거 상원위원은 법무장관 지명자 에밀리 기닌에게 묻습니다. “국가가 준수할 진리가 없습니까? 결국에는 어쨌든 우주를 통제하는 물리의 법칙이 있습니다. 우리를 제약하는 도덕률 또한 없습니까? 국가를 통제하는 진리들이 없습니까?” 기닌 교수는 대답했습니다. “진리요? 나는 진리를 믿습니다, 의원님. 진리란 연방판사 올리버 웬들 홈스가 언젠가 글로 썼던 ‘다수의 의지’를 말합니다. 당신이 아주 열심히 지지했던 로버트 복 판사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진리란 어떤 시점에서 다수가 진리라고 말하는 그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수는 끊임없이 진리의 가치를 관리하고 재정립하는 것을 허락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유일한 절대 진리란 절대 진리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본질에 대한 이러한 담론은 역사적 허구성 여부를 뛰어넘는 문제입니다. 알렌 블룸은 1987년에 쓴 “미국 정신의 종말”에서 이와 유사한 관점을 서술하고 그 것을 미국 젊은이들의 특성이라고 말했습니다. 블룸에 의하면 “교수가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거의 모든 신입생들이 믿거나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진리는 상대적’이라는 것입니다.”

블룸은 더 나아가서 이에 대해 “오늘날의 학생들에게 진리의 상대성이란 이론적인 통찰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자유사회의 조건인 도덕적 가설이거나 그들이 진리를 상대적인 시각으로 본다는 것입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들은 자유사회에서 가톨릭교, 침례교, 힌두교 교도들과 무신론자들이 함께 살기 위해서는 다른 어떤 것보다 관용과 열린 마음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 자세를 가져야만 한다고 믿습니다. 블룸은 그런 세상에서 “참된 믿음의 사람은 실존하는 위험인물이다. 역사와 문화를 연구한 결과가 가르쳐 준 바에 의하면 과거에는 전 세계가 미쳐있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항상 옳다고 생각했고 그로 인해 전쟁, 종교탄압, 노예제도, 외국인 혐오, 인종차별, 국수주의가 유발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런 잘못을 바로 잡아서 옳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당신이 옳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라고 관찰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지닌 바꾸기 힘든 사고방식입니다. 상대주의 시대의 가치와 논리는 우리의 문화라는 직물 안에 너무나 잘 짜여있어 역사가 전하는 이야기는 잊기 쉽습니다. 우리는 모세가 그의 도덕적 원칙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10계명을 어겼을 때 그것으로 인해 결국 우리가 파멸되라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성의 절대성을 거부하는 것만으로도 성중독, 난치병, 원치 않는 임신, 신뢰에 대한 배반, 결혼파경, 성 정체성 혼란, 건강 상실, 그리고 죽음이라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중력의 법칙처럼 도덕의 절대성은 가끔씩 이익을 주기보다는 해를 끼치는 일이 더 많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가슴 속 빈자리 


상대주의는 새로운 개념이 아닙니다. 기원전 5세기에 그리스 철학자 피타고라스가 인간의 판단은 주관적이어서 한 사람의 지각은 그 사람에게만 타당하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보다 앞서 실용적인 상대주의의 본보기가 성경에서 발견됩니다. 사사기 17:6과 21;25는 인류 역사상 가장 암울했던 한 시대를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몇 세대가 지난 후, 이스라엘의 세 번째 왕인 솔로몬이 군인이며 왕이었던 아버지 다윗의 도덕적 원칙들을 거부한 후 심오하고 중요한 문제들과 힘들게 씨름하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필적할 이가 없었던 가장 지혜로운 왕 중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 솔로몬은 개인적이고 정치적인 평화를 위해 잠시 동안 원칙을 희생시켰습니다. 열왕기상의 기록을 보면 그는 이방 왕들의 딸들과 연속적으로 정략결혼을 함으로써 인접 국가들과 동맹을 맺었습니다(왕상 11:1-8).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 17:6




전도서라 불리는 솔로몬왕의 개인적인 수필에서 보면 솔로몬 역시 광범위한 인생경험 속에서 인간적인 만족을 추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교육, 음악, 술, 연인 관계, 더 나은 집과 정원들에서 의미를 발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인생 여건의 변화 때문에, 그리고 어떤 즐거움으로도 메울 수 없는 가슴 속의 빈자리 때문에 언제나 그는 허허롭고 힘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이 처한 혼란을 사려 깊게 평가해보고 솔로몬 왕은 인생의 기한들조차도 영원한 목적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진정으로 부정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의미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 3:1-11)







조용히 사색에 잠겨 있었을 때, 왕은 그의 가슴에 빈자리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인생의 기한들이 지닌 아름다움에 도전을 받았고, 일생 누렸던 즐거움들로도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킬 수 없었던 솔로몬은 그분의 형상대로 자신을 창조하였던 바로 그 분을 기억했습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12:13-14).
 




누구인가가 옳거나 그르다고 누가 말하나요?


점점 더 많은 미국사람들이 솔로몬이 도달했던 결론을 포기하는 것 같습니다. 1991년, 기독교 여론조사 기관인 바나 연구소는 미국의 성인 67 퍼센트가 절대적인 진리 같은 것은 없다는데 동의했다고 보고했습니다. 1994년에는 그 숫자가 72퍼센트까지 상승했습니다. 같은 해에, 스스로 자신을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의 62퍼센트가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한다는데 대해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이 수치에는 평신도뿐만 아니라 종교 지도자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많은 교단에서 영적지도자들이 공통적으로 그들 자신의 신앙을 믿음이라기보다는 전통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목사들도 나머지 문화에 속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문을 활짝 열 수 있습니다. 그들이 역사적인 그리스도교 교리를 제외한 모든 것에 개방적인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 성직자라는 상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많은 성직자들이 성경적 신앙의 교리보다 상대주의의 교리에 더 충실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믿지만 다른 사람들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교회의 안팎에서 이렇게 숫자가 늘어나는 것은, 성서적으로 정의된 진리를 신실하게 따르는 것을 덕목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용의 자세와 상호 존중을 표현하는 것을 덕목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관용이나 상호존중에는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너무 활짝 열어젖혔기 때문에 진리와 오류를 구별할 수 없는 마음에는 무언가 잘못이 있습니다.

전체 신구약 성경의 증거들은 이런 흐름에 저항합니다. 성서적 신앙의 탁월함은 이것이 지리적 역사적인 사건들 속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적적인 이집트 대탈출과, 죽음에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육신의 부활은 우리와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우리의 신앙은 역사에 그들의 자취를 집단적으로 남긴 그런 증인들의 증거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손과 발에 못 자국 상처가 있는 예수님에 대한 증인들은 다원주의 세계에 살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할 말이 아주 많습니다. 이들 제자들은 종교적인 신념 이상의 것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들은 본디오 빌라도의 권한 아래서 십자가에 달렸고, 경비병이 지키고 있었던 봉인된 무덤을 깨고 3일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다시 사신 그리스도는 다민족, 다문화세계의 두려움에 대한 답입니다. 자신이 선포한 진리를 결코 훼손하지 않고 예수님은 우리의 이웃은 물론이요 우리의 원수까지도 마찬가지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분 자신의 속성이나 그분의 아버지의 그 어떤 절대적인 가치도 타협하지 않았던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라는 평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품성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도덕성의 절대적인 원칙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드러냈다면 동시에 그분은 도덕적 결정의 모든 절대적인 기준의 근원을 드러낸 것입니다.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오로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무엇이 옳은 지를 보여주시는 하나님이 궁극적인 절대자임을 그리스도가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도덕적 절대성의 본보기들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핵심은 구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그리스도가 찾은 도덕의 기준들은 그의 삶의 척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구약성경의 대부분은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영원한 형태의 도덕률로 표현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도덕적 절대성과 사랑하는 자세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었습니다.




구약 성경 39권 중 대부분은 설화체입니다. 어떤 것들은 시문학이고 어떤 것들은 지혜의 일반적 규범들입니다. 그런데 이들 모든 구약 성경의 배경에는 그 자신의 속성이 절대적인 도덕률의 기초인 하나님이 계십니다.

도덕적 절대성의 요구하는 것들을 충시킨 몇몇 율법들을 살펴봅시다.


신앙과 예배를 지키기 위한 절대성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모든 율법 중 가장 중요한 것을 확인해주기를 부탁했더니 예수님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달리 예수님은 균형 잡힌 관점에서 절대성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계명의 첫 계명을 인용하며 시작할 것으로 기대했을지 모르지만 자신들의 위선을 폭로하는 그런 방법으로 대답하실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2-3)라는 모세의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인용해서 대답할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대신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들은 종교 율법을 사랑했으니까 하나님도 사랑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하나님을 사랑했다면 하나님이 사랑하셨던 사람들을 사랑했을 것입니다.

도덕적 절대성에 대한 첫 번째 정의를 하면서, 예수님은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용서가 절실하게 필요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한 절대성


예수님은 또한 가족을 지키기 위한 영원불변의 율법 정신을 지켰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을 공경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예수님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 20:12)라고 가르쳤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우리가 역사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알게 되는 첫 기회입니다.




오늘날의 젊은 사람들은 권위를 인정하기보다는 권위에 대한 질문을 히도록 조장하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많은 부모들, 정부들, 종교기관 단체들에 유해성이 있기 때문에 이런 의심은 어느 정도 필요합니다. 성경에서도 믿음이 없는 아버지를 아무런 비판 없이 따르는 것은 잘못이라고 경고합니다. (왕하 21:20).

성경에서도 부모공경을 모든 문화권에서 그러하듯 영원불변인 원칙으로 간주합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부모들의 권위를 존중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다면 (권위를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배우기 전에) 인생의 다른 영역에서 선한 권위와 악한 권위의 차이점을 식별하는 것을 배우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를 무시하며 자라난다면 부모들에 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하나님의 권위를 포함한 모든 권위에 저항하는 것과 같습니다.

가족 관계를 지키기 위한 또 다른 교훈은 일곱째 계명 “간음하지 말라”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 사회의 피임이 그런 원칙의 필요성을 보완했다고 생각하지만 이 율법은 영원불변한 지혜로 온전하게 남아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가 피임을 해가며 바람을 피웠다면 어떤 배우자가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까요? 결혼한 부부라면 결코 바람피운 적이 없는 남편이나 아내를 갖는 것을 더 좋아하지 않을까요?

사랑이 결코 이상적이 아니었던 과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관계의 감정적 정신적 속성에 대하여 눈을 감지 맙시다.




문화적 상대주의는 성적 자제심의 울타리를 파괴합니다.




성경은 아직도 세상에서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번성하게하기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는 관계들에 대해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성적인 열정이 결혼생활에서는 멋진 것이지만 (히 13:4) 평생을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공유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무릎 위의 불과 같은 것이라고 간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 간의 성관계는 간통이나 간음으로 생각합니다. (히13:4; 고전6:18). 하나님은 우리를 염려하기 때문에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 모두 동성애는 비정상적이며 (롬 1:26)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의도에서 벗어나 남자와 여자가 자신을 해치는 것이라고 경고합니다.(고전6:9-10)


생명의 신성불가침을 지키기 위한 절대성


가인 이래로 계속 존재했던 살인에 대하여 우려하며 모세는 “살인하지 말라”라고 말했습니다. 이 계명은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이 아무 죄도 없이 피를 흘리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원칙은 단순히 인간의 생명을 지키자는 것뿐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성스러운 속성에도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현시대의 도덕적,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하여 낙태에 대해 궁금해 할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낙태를 콕 찍어서 금지하는 계명을 주시지 않았을까요? “낙태의 확산: 미국의 침묵의 대학살”에서 칼 래니는 메레디스 클라인의 글을 인용합니다. “낙태에 관한 성경의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낙태에 대해 아예 아무 언급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여성들이 낙태를 원한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형법에 이 죄목은 언급할 필요도 없었던 것입니다.”

유대인 가정에서는 자녀들과 출산에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는 몇 몇 입증할 수 있는 사실을 열거한 뒤 래니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흥미롭게도, 고대 앗시리아의 법률에는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는 이방 국가들에서 일어나는 낙태들도 증오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그 법들에 의하면 낙태죄를 선고받은 여자는 뾰족한 말뚝에 꽂히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낙태 과정에서 생명을 잃어도 같은 형벌에 처하여 그런 가공할 행위에 대한 공동체 사회의 거부의사를 표현했습니다.”

 

정직한 관계를 지키기 위한 절대성


하나님은 성경에서 계속해서 모든 형태의 절도, 부정직, 속임수를 금지했습니다. 10계명 중 제 8계명은 “도둑질하지 말라”(출 20:13)입니다. 제 9계명을 읽어보면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16절)라고 합니다. 제 10계명은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17절). 이들 계명들과 함께 바울의 명령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골 3:9)라는 구절은 정직하고 진심어린 인간관계에 대한 영원불변인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직의 상대적인 가치를 보고 있으며 정직을 하나님의 속성 그 자체에 뿌리를 둔 윤리의 절대적인 원칙으로 보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거짓말을 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악이 되었습니다. 많은 남녀 전문직 종사자들은 자신들의 직업에서 진실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간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정직하여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게 하라고 가르쳤습니다(마 5:37). 성경의 하나님에 의하면 진리는 상대적이 아닙니다. 정직은 도덕의 기초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뢰성과 품성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입니다.


율법 적용의 예외들


 지금까지 우리는 모세의 십계명 중 영원불변한 도덕의 절대성을 표현한 아홉 계명을 설명하거나 암시해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출 20:8)라는 제 4계명은 생략했습니다.

우리는 “살인하지 말라”(13절)라는 계명도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아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정당방위로 인한 살인, 공의로운 전쟁에서의 살인, 특정 범죄자에 대한 사형을 용인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권위에 순종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치 치하에서 유대인을 숨겨주었다가 생명이 위험에 빠졌던 코리 텐 붐과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존경하며 기억합니다.

결혼은 평생 함께하는 연합이라는 하나님의 의도를 우리는 지지합니다. 그렇지만 “음행의 연고”가 있으면 이혼이 정당하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경우에서 우리는 절대성을 이야기하고는 그것을 수정합니다. 왜냐하면 성경 자체가 성경의 율법 중 일부는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적인 기준이 되지 못함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 대한 비절대적 율법


시내 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주의 일곱째 날을 완전히 쉬는 날로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심지어는 노예들과 가축들도 모든 노역에서 벗어나 쉬었습니다.(출 20:8-11). 하나님은 몇 주 앞서 여섯째 날에 갑절의 만나를 걷어 상하지 않도록 보관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안식일의 개념을 소개하셨습니다. (출 16:23-26) 그러나 성경의 내용과 고고학적 증거를 결합해 보면 아담에서 모세에 이르기까지 자세한 안식일 율법이 존재했다는 증거가 없음을 보여줍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안식일이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바울은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니”라고 써서 안식일이 교회시대를 위한 법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심지어 안식일 율법이 유효했을 때도 구덩이에 빠진 동물을 끌어내는 것은 금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주목해야만 합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다고 비판을 받았을 때 예수님은 이 일을 지적하셨습니다. 심지어 가장 엄격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까지도 쉬어야 하는 날 좋은 일을 하는 것을 율법이 허락한다고 인정해야 했습니다. (막 2:23-28; 눅 6:6-11; 13:14-15; 14:1-6)

안식일에 대한 계명을 세우신 하나님은 이 계명 지키기를 수정하여 안식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표징이라고 선포하고 교회시대의 믿는 자들은 안식일을 지킬 의무를 지지 않는다고 분명히 하셨습니다.


살인에 대한 비절대적 율법


하나님은 “살인하지 말라”(출 20:13) 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군대들을 이끌고 전쟁을 하셨고 특정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돌을 던져 죽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신 13:10; 17:5; 21:21; 22:21,24).

이 주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는 살인을 금하는 절대적 율법과 살해에 대한 한 비절대적 원칙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사전 모의, 고의적 복수, 그리고 강도, 방화, 유괴 같은 심각한 강력 범죄로 인한 살인은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자신이나 혹은 타인을 방어하기 위해 사람을 죽인 찰, 전쟁 중 사람을 죽인 병사, 혹은 사형판결 집행을 한 국가가 지명한 사형집행인은 살인을 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일들은 망설임 속에 수행되며, 그들의 목적은 다수의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그들이 없으면 무정부 상태가 만연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절대적으로 보였던 어떤 율법들은 나중에는 주변 여건에 의해 수정되었습니다.





순종에 대한 비절대적 율법


성경은 시민들은 정부에게, 아내들은 남편들에게, 자녀들은 부모들에게, 노예들은 주인들에게, 국가 권위와 종교적 권위에 순종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친구들은 느브갓네살의 동상에 절하라는 명령을 거부했지만 기적적으로 구조되었습니다(단 3장). 사도들은 당국이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라고 대응했습니다.

성경은 여자들과 아이들이 남편들이나 부모들의 학대에 대항할 상세한 방침을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남편이 생각하기에 심각한 흠을 아내에게서 인지한 남편을 위한 이혼 율법을 용인했습니다(신 24:1-4). 이것은 그런 여자가 평생을 학대받지 않도록 보호했던 것이며 재혼의 문도 열어주었던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적 부도덕”이 하나님이 타당하다고 보는 이혼의 이유라고 했습니다(마 19:9). 그리고 사도바울은 믿지 않는 배우자가 믿는 배우자를 고의로 방치하면 이혼의 사유가 된다고 선포했습니다(고전 7:15). 이것 역시 바울이 남편이 바람을 피우지 않았어도 남편에게 학대받는 아내가 이혼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선포한 후에도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고전 7:10-11). 결혼생활을 지속하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이혼을 하더라도 문제가 있는 배우자가 결혼하지 않는 한 다른 배우자는 재혼할 권리가 없도록 함으로써 위험한 상황에 대비하는 안전판을 마련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모로부터 학대받는 자녀들에게 부모에 대한 책임에 대하여 지침을 주지 않습니다. 폭력적이거나 부당한 정부와 그리스도인의 관계에 적용하는 원칙들, 폭력적이며 정당하지 않은 배우자와 그리스도인 배우자의 관계에 적용하는 원칙들을 학대하는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에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 6:1)”라고 명령했습니다. “주 안에서”라는 구절을 통해 하나님은 자녀들이 하나님이 원하는 순종의 자세로 부모의 권위에 순종하라고 순종의 조건을 제시한 것 같습니다.




성경이 뜻하는 모든 것들이 어떻게 율법을 적용하는지 우리가 알아야만 주변 여건에 의한 율법인지 절대적 율법인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무슬림 가정에서 자란 한 젊은이가 그리스도와 인격적 만남을 거부하고 부모에게 순종하며 남아있어야 할까요?

요약하면, 우리더러 하나님을 거역하라고 요구하는 권위에 대한 순종은 분명히 잘못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공손하게 해야 하고 겸손하게 규정된 벌을 받아야합니다. 더욱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전달하는 사람들로서 우리가 지닌 위엄은 우리가 학대를 받으면 손상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학대에 저항할 권리,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저항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 안에서 저항해야 합니다. 박해나 악행을 피하는 것이 불가능하면 우리의 구주를 본보기로 삼아 기억하며 박해를 견뎌내야 합니다(벧전 2:18-25).


거짓말에 대한 비절대적 율법


하나님은 거짓말과 모든 형태의 악의적인 중상모략을 못하게 하면서, 악인들에게 판단을 그르치는 답을 기민하게 주는 것을 허락하는 사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해 나가도록 보내면서 모세더러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데리고 광야에서 희생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3일 동안의 여행을 허락할 것을 요구하라고 말했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사무엘은 자신이 이새의 아들 중 하나를 이스라엘의 다음 왕을 세우는 의식으로 기름을 붓기 위해 이새의 집으로 갔다는 것을 사울 왕이 알게 되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는데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암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베들레헴에 가서 희생 제사를 드리러 왔다고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사가 이유 중 하나이긴 했지만 진실의 전체는 아니었습니다(삼상 16:1-3). 즉, 우리는 모든 진실을 말하면 죄 없는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게 될 때 진실의 일부만 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라면 절대로 부인하지 않을 진실을 부인하는 것과 진실의 일부만 말함으로써 악인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정치 전략에서 절대적 진리의 역할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현대 민주사회에서 자유 시민들이 직면하는 그런 문제들과 직면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정치지도자를 선택하거나 법을 제정할 권리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투표를 할 수 없었고 집권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임무는 모든 사회계층의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영적 도덕적 지배를 중심을 하는 또 다른 나라로 초청하는 것이었습니다.

민주국가 혹은 공화국에 있는 그리스도인 시민들은 정부 지도자들이 당선되도록 도와줌으로써 정부에 참여할 기회가 있습니다. 이런 특권은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정치적인 절차를 거쳐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공통의 가치관을 그 나라의 법으로 만들기 위해 반드시 노력해야할까요?

어떤 사람들은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정치와 문화를 되돌려 놓아야 하고 민법을 모세의 율법과 일치하도록 제자리에 놓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임무라고까지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 주장은 양성애자나 동성애자에게는 사형 판결을 내리고 단 하나의 종교만 합법화하는 법을 제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너무 심하게 나가는 사람들은 단지 소수이고 많은 사람들은 종교적 믿음을 바꾸어 투표하도록 하고, 대표자들을 투표로 뽑고, 정치적 사법적 개혁의 대표자들을 뽑음에 있어서 정치 전략적 언어를 구사합니다.

반면에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형태로든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반대합니다. 그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길 잃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명예롭게 하는 삶을 이룰지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그리스도가 올 때까지 우리는 빈곤층, 사회적 불평등, 범죄, 혁명, 전쟁과 함께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그들은 현재 우리 사회의 자유방임과 잔인함을 디모데후서 3장의 성취로 보면서 사회전반에 널리 퍼져 있는 악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라고 믿습니다.




비슷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전략상의 차이로 인해 나누어집니다.




그들은 우리의 역할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왕국으로 세상 사람들을 초청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성경적 절대성과 일치하는 입법보다는 도덕성 상실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을 구원받은 이들의 삶에서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문제가 전략중 하나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성경의 하나님이 사회적 불평등, 인종분쟁, 가정폭력을 염려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합니다.

잠언 14:34의 말씀은 항상 진리입니다.

공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 (14:34)


이사야서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장로들과 고관들을 심문하러 오시리니 포도원을 삼킨 자는 너희이며 가난한 자에게서 탈취한 물건이 너희의 집에 있도다.
어찌하여 너희가 내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하느냐 주 만군의 여호와 내가 말하였느니라 하시도다” (3:14-15).


 로마서 1:18-32에서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분노는 그분을 거부하고, 그분을 영예롭게 하기를 거부하고 억압과 폭력의 길로 내려가는 반역에 대적하여 일어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을 보살핍니다. 그는 인간의 폭력성으로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들이 투표하고 법을 제정하기 위해 자신의 믿음을 바꾸는 것을 원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정치적 사법적 개혁을 위해 조직을 만드는 것을 좋아할까요? 아니면 하나님은 그분의 사람들을 불러 니느웨 거리의 요나가 되게 할까요?




다원적인 사회에서는 그들이 우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만큼 우리가 그들에게 해준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그리스도인들은 기표소에서 그들의 도덕률에 따라 투표할 필요가 확실히 있습니다. 그러나 다원적 사회에서 그리스도의 율법을 적용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최소한, 그들이 우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만큼 우리가 그들에게 해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무슬림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념에 위반되는 문제에 대해서 투표하는 것을 우리가 대체 어떻게 원할 수 있을까요? 뉴에이지 신문화 운동 추종자가 보수적인 교회가 누리는 자유를 훼손시킬 수 있는 정책적 문제에 대해 투표 하는 것을 우리가 대체 어떻게 원할 수 있을까요?

만약 충분한 표를 얻으면 우리는 무슬림이나 뉴에이지 추종자를 그리스도에게 돌아오게 할 수 있고 답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만큼 우리가 그들에게 해주라는 절대적 율법을 믿는다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조심스럽게, 기민하게, 사랑을 가지고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는 모세로부터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의 이스라엘처럼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는 없습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등장했던 그 장면처럼 하늘에서 내려오는 불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분을 대변하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자멸의 경향을 지닌 세계와 대적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종의 마음과 예언자의 목소리를 가지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2차 세계대전 직전 독일의 그리스도교 지도자들 중에는 나치의 반 셈족 정책에 적극적으로 반대의 목소리를 냈던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오늘 날까지 당연히 비판을 받습니다.

이 시대에서 히틀러 같은 파괴자는 무엇입니까? 낙태에 관한 국가정책입니까? 아니면 수백만의 사람들이 자기 눈으로 보기에 옳은 일을 행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믿도록 이끄는 상대주의가 그 파괴자입니까? 절대적인 도덕적 신념이 없어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성애와 동성애의 죄의 불길 속으로 떨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만족과 고통회피라고 가정하며 우리는 음식, 알콜, 일, 텔레비전, 성에 중독됩니다. 종교는 모두 좋은 것이라고 가정하고 수십만의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잃고 예수님이 말씀했던 일종의 영원한 상태로 어느 날 깨어나 마주칠 현실을 무시합니다.


교회의 역할


각 교회는 예배, 성경 공부, 예배의식의 집전, 교정 훈련, 성도 간의 격려, 전도를 위해 연합한 믿는 자들의 가정입니다. 성경에서는 각 교회나 교회집단들이 이 땅위의 법들을 바꾸는 것을 시도해야한다고 직접적으로 지시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역사는 교회들이 정부와 연합하거나 국가와 권력을 공유하려는 시도를 했을 때마다 더 나빠졌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교회는 정치적 전략과 예언적 전략의 차이를 조심스럽게 저울질 해봐야 합니다.




목사들과 교회지도자들은 사회적인 문제들과 관련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애정을 기울여 선포하는 것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성경은 사회정의, 결혼의 신성함, 좋은 가정의 특징, 성도덕의 기준들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진리들은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현관이 도덕적인 문제들에 대한 정치적 반응을 정리하는 일에 사용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조심스럽게 생각해야만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취하여 사려 깊게 하나님의 가치를 자신들의 삶에 적용하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랑이 담긴 예언자의 음성을 가지고 우리 사회로 뻗어나가기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는데 필요한 곳입니다.

우리들에 대한 평판이 정치적 제휴에 엮이면 안 되는 추가적인 이유들이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단순히 우리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보다는 그들을 위하여 도덕성을 쟁점화 한다는 것을 감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약 칼럼니스트 콜만 맥카시는 “공화당은 재정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는데 이것은 명백히 비가정적인 것입니다. 공화당전국위원회의 주요 기부자들 가운데는 알콜, 담배, 도박, 총기 이익단체들이 있습니다.” 정당이나 정치그룹들에 동질감을 갖는 교회들은 불가피하게 신앙고백을 타협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증인 역할에 해를 끼칠 것이며, 주된 책무에서 벗어나 옆길로 빠질 것입니다. 교회의 역할은 영적인 것이며, 정치적인 힘이 아니라 항상 도덕적 설득으로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기독교 시민의 역할


개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문화 속에서 그들의 모범이 되는 분을 본받아 도덕과 정의를 높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고취하는 말과 행동으로 예수님을 닮은 가치관을 실증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최선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우리가 그들을 위한 사람이 아니라 그들과 맞선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하는, 비웃음, 무례함,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우리가 영적, 도덕적 관심을 표현할 때는 마음을 끌며, 정직하고 예의바르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비록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라고는 해도 우리의 성실성은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가 불공정한 공격을 받거나 고의적으로 잘못 알려져도 이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그리스도의 정신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가 한 말이 적절합니다.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벧전 3:13-17).


이런 태도를 유지할 수 있으면 우리는 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닌 원칙에 대해서 책임질 수 있다면 우리는 사회의 선이 될 것입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존 아담스는 “우리에게는 도덕과 종교의 굴레를 씌우지 않은 인간의 열정과 겨룰 능력이 있는 정부가 없습니다. 우리의 헌법은 오직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을 위해 제정되었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도 통치하기에는 전적으로 부적절합니다.”

오늘날, 세속주의자들과 몇몇 종교 지도자들은 언제든지 필요하다면 동성 결혼, 성 매매, 낙태의 합법화에 대해 논쟁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본보기가 되어 애정어린 행동으로 그런 관행들은 사회적 고통과 혼란이 깊어지게 할 뿐이라고 경고해야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마 5:13)




어이없게도, 교회는 지도자들이 실제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 없이 말만 번지르르하게 한 탓으로 설득력을 잃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명확하게 말로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을 도덕적 순수성의 수호자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그런 기준에 맞춰 살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위선자가 되어서 그들을 예수님의 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처럼 될까봐 두려워하며 패배를 인정하지 맙시다. 지금 필요한 것은 흑암의 항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리의 불꽃을 다시 타오르게 할 회개와 사랑입니다.

사회는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인 것은 아님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거의 20년에 걸쳐 이 상대주의 철학이 유행입니다. 세속주의자들이 추구하고 있는 이상적인 문화는 “여성이 자신의 몸을 통제할 권리가 공식적으로 인정되고 존중되며, 성인의 성적 취향은 동성애건 이성애건 그 당사자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든 상관할 수 없으며 정부기관들은 종교적 표명을 피해야하고 공립학교는 종파에서 자유로운” 문화입니다. 이런 자유들이 수백만 건의 낙태, 에이즈의 확산과 혼외출산의 급증을 초래해왔는데 어느 소수집단에서는 신생아 10명 중 7명이 혼외 출산이었습니다.




낙담한 사람들은 그들의 선택으로 인한 대가를 따져보면서 그들의 죄 값이 완전히 지불되었다는 말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문제들이 낙태 전면 불법화, 실제 동성애자 투옥, 미혼모 지원 삭감 같은 법률제정으로 마무리되는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어떤 아주 중요한 분께서 교만과 완고한 도덕적 홀로서기를 미워한다는 것을 알아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중요한 분께서 그들이 무관심했던 도덕규범에 의해서 상함을 입는 것을 걱정할 정도로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 안에서 친절과 섞여 있는 악에 대한 격렬한 증오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은혜로운 배려와, 이미 우리의 죄를 용서했고 우리를 사랑으로 채워주신 그 분에게로 그들을 끈기 있게 끌어당기는 건전한 논리를 우리 안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도덕의 절대성을 깨는 것이 아니라 거저 받는 구원과 우리를 보호하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임을 거부하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전 세계가 필요로 하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우리는 스스로 의로운 사람입니까? 우리는 옳고 다른 사람은 그르다고 말하는 우리가 도덕적으로 오만합니까? 우리가 지닌 의로움이 예수님의 못 박힌 발밑에서 우리가 받았던, 그러나 우리는 받을 자격이 없었던 용서로 인한 것이 아니라면 그렇습니다.

더 나아가서, 현재의 정치적 논쟁보다 훨씬 더 넓고 깊게 죄가 뻗어나간 것을 우리가 인식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낙태나 동성 성관계 같은 사회적 문제와 싸우느라고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고 있는 동안에도 우리가 고려해야할 더 나쁜 죄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우리자신의 노력으로 바르게 되었다고 믿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독선이 아닙니다.




이쯤해서 우리의 종교계는 우리들 가운데 누구의 마음에서도 소돔과 고모라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을 분명히 했던 에스겔의 예언의 목소리를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소돔의 사람들을 심판했던 것이 그들의 동성애 때문이라고 우리가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것은 단지 전체 그림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에스겔은 죄는 노예가 되는 기회를 균등하게 준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곧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
(16:49-50)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가 주는 교훈을 통하여 우리와 동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소돔의 성도착과 가정폭력 이면에는 자신들을 우주의 중심으로 놓는 사고방식이 있었음을 알도록 해줄 수가 있습니다. 제국을 무너뜨린 죄들의 이면에는 자신들의 필요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자신들이 보기에 좋은 일만 하는 자기중심적인 형태의 개인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명예를 잃고, 그들의 가족과 일가친척 외의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잃을 때 모두 다 대가를 치릅니다.




이기심이 교회를 가득 채우면 이기심은 사회로 흘러넘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에 대한 메시지를 아는 사람들이 지금 눈앞에서 다른 사람이 당하는 고통이나 그들의 영원한 영혼을 보살피는 것을 중단하고, 그 대신 방어적 도덕주의자들의 자세로 마차들로 둥그런 울타리를 만들면 그 사회는 뒤집혀서 고유의 율법들이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법을 더 많이 만드는 것으로는 더 이상 도덕률을 믿지 않는 사회를 바꿀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성경의 절대성으로도 구원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절대주의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사회가 도덕적 공감대를 상실하여 법과 질서의 기본이 상실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보아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로부터 사회적 통제력을 앗아가는 상대주의는 더 큰 위험을 초래합니다.

조지 맥도웰은 그의 저서 ‘악에서 선으로’에서 우리의 문화에서 상대주의가 지배하여 생긴 폐해의 사례들을 들었습니다. 그는 또한 우리가 젊은이들에게 그들이 처한 엄청나게 위태로운 개인적 문제들을 보여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우리를 비난했습니다.

맥도웰은 만약 우리가 단순히 도덕적으로 “해야만 하는 것들”과 “해서는 안 될 것들”만 가르친다면 우리자신과 젊은이들에게 도덕적 율법주의를 심어주기 쉽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더 나은 접근법은 아래 세 가지 요소들 간의 관계를 조심스럽게 다루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합니다.

  1. 행동 수칙 (“해야 할 것들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 지침 권고

  2. 원칙

  3. 인격적으로 절대 불변인 하나님의 품성


성경 속의 “....해야 마땅하다고 (ought)"라는 말씀은 원칙에 뿌리를 둔 것임을 이해하고, 영원불변의 원칙과 하나님의 품성 간의 연관성을 알아야만 우리는 옳은 것과 그른 것의 진정한 차이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맥도웰은 주장합니다.

여기서 그는 중요한 점을 지적합니다. 만약 우리가 조심하지 않으면 우리는 도덕적 절대성을 당초에 결코 의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변질시키기가 쉽습니다. 우리는 도덕적 절대성을 부모 세대의 의견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그런 인상을 남겨준다면 우리의 젊은이들은 그들 앞에 정말로 놓여있는 도덕적 문제들을 간과하기가 쉽습니다.

신약성경에 의하면 가장 중요한 도덕적 율법일지라도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도바울은 율법이 우리에게 무엇이 옳은지 보여줄 수 있지만 바로 그 율법이 결코 우리를 선하게 만들지는 못함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율법에 대한 지식이 우리로 하여금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느끼게 할 수 있습니다. 옳은 것과 그른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믿으면 도덕적 수준이 높아진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아주 힘주어 말했듯이 율법을 아는 것과 지키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율법을 아는 것과 그것을 지키는 것 사이에는 굉장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바울은 율법은 우리에게 우리와 우리를 스스로 만드신 하나님 사이의 간격이 얼마나 큰지 볼 수 있는 척도를 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성령이 자신들의 선택을 관장하고 그 선택에 에너지를 공급하도록 맡긴 사람들에게 하나임의 품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과 용서를 얻고 누릴 자격을 갖기 위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쓸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2:16).


 율법은 올바르게 이해하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하고 하나님의 성령만이 우리에게 새로운 마음을 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바울이 그들의 죄 때문에 돌아가신 그 분을 이미 믿었던 에베소 교인들에게 편지를 쓴 이유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2:8-9)


 그러나 우리가 율법 지키기에 실패한 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은사에 의존하게 만든다는 것 을 깨달았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해서 우리 나름의 도덕적 절대성을 지키며 살아가려는 노력이 우리를 선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그런 실수를 범한 한 무리의 교회 사람들에게 바울이 쓴 것을 읽어보십시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3:1-3)


 하나님의 절대적인 율법이 이제까지 한 일은 우리가 누릴 자격이 없는 하나님의 성령의 도움이 우리에게 필요함을 보여준 것이 전부입니다. 율법이 이제까지 해줄 수 있었던 일은 우리가 우리 눈으로 보기에 올바른 것을 지키며 살아가려는 시도가 얼마나 큰 실수인지 보여준 것뿐입니다. 율법이 할 수 있는 일은 구원과 구원 이후의 삶에서 우리 안에 진리와 사랑의 마음이 깃들기 위해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좋은 소식은 그 어떤 율법도 줄 수 없었던 생명을 우리에게 주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