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48호)

작성자
한국오늘의양식사
작성일
2019-11-05 12:40
조회
3489

차 례


발간사 / 김상복 목사

서문 / 마크 스트라우스

  1. 복음서 소개

  2. 마태복음 읽기

  3. 마가복음 읽기

  4. 누가복음 읽기

  5. 요한복음 읽기


발간사


구약은 구원자 메시아가 오신다는 예언이고, 신약은 그 분이 오셔서 구원의 역사를 마치고 천국의 아버지께로 돌아 가셨다가 인류의 마지막 심판을 위해 다시 오실 것 이란 내용입니다. 사복음서는 오신 예수님을 네 개의 카메라가 조금씩 다른 앵글에서 동일한 주님을 찍은 내용입니다. 인류의 구원자 예수님을 알려주어 누구나 그 분을 믿음으로 죄 사함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려는 궁극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사복음서의 목적과 특징을 알면 예수님을 더 이해하게 됩니다. 복음서를 알고 나면 남은 성경들이 보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의 첫 발걸음입니다. 모두 읽으시고 도움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발행인 김상복 목사


서문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들은 가장 좋은 소식은 무엇이었나? 아마도 늘 입학을 꿈꾸던 대학에서 장학금을 주겠다는 편지일 수도 있고, 자녀로부터 손주가 태어났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전화일 수도 있다. 이러한 것은 정말로 반가운 소식이다. 혹은 의사로부터 치료가 잘되어 암이 다 없어졌다고 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정말로 좋은 뉴스이다.

신약성경의 처음 네 권인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은 복음서라고 하는데, 이때 ‘복음’이라는 말은 ‘좋은 소식’이라는 뜻이다. 이들을 복음서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들 네 권의 책이 이제까지 들어보지 못한 엄청난 소식을 전하고 있기 때문인데, 곧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라고 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인류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다고 하는 것이다.

마크 스트라우스 Mark Strauss


복음서 소개


우리 모두는 다 좋은 소식을 듣기 원한다. 때때로 좋은 소식은 괜찮은 상황을 더 좋게 만들 수도 있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할 수도 있으며, 좋지 않은 상황을 바꿀 수도 있다. 또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는 곳에 희망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복음은 좋은 소식인데 절실히 원하는 세상에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복음은 바로 하나님이 그의 세상을 구하셨다는 좋은 소식이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죄를 범한 이후 인간은 하나님과 멀어졌고 창조주로부터 분리되었다. 그러나 은혜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실행하셨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 계획에 대해서 말했고, 세상에 구원과 회복을 가져다 줄 구원자 즉 메시아가 올 것을 예언하였다. 이 구원을 설명할 때 이 선지자들이 자주 사용한 말이 바로 ‘좋은 소식’이요 ‘복음’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표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표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이사야 52:7)
메시아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기름 부은 자’를 뜻하는데 그리스어로는 ‘그리스도’로 번역된다. 이 단어는 유대교에서는 그의 백성들을 구원할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라는 의미로 쓰인다.
좋은 소식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하기 위해서 오셨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길을 여실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치기를 시작하셨을 때 이사야서에서 이 말을 가져 오셨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마가복음1:15)라는 것이었다.

우리들의 죄 때문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그가 완성한 구원을 세상에 알리도록 그의 제자들을 보내셨다. 그의 제자들이 이 메시지를 설명한 말이 바로 ‘좋은 소식/복음’이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우리 복음(유앙겔리온)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데살로니가전서 1:5)라고 썼다.

복음이 구원에 대해 선포한 말씀이라는 사실은 이 네 복음서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복음서는 기독교의 시작에 관한 케케묵은 역사서가 아니다. 그것은 또한 예수에 대한 전기도 아니다. 복음서는 구원을 선포하는 글로 쓰인(그리고 누가복음에서는 조사된) 기록이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20:30-31)
고대 사회에서는 글로 쓰인 기록도 있지만 새로운 소식과 정보는 주로 입에서 입을 통한 구전으로 전해졌다.
요한은 사람들이 단순히 예수에 관한 사실을 알게 하려고 쓴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고 반응하게 하려고 기록하였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책이나 짧은 글을 읽을 때 생기는 첫 번째 질문은 ‘내가 무엇을 읽고 있는가?’이다. 우리가 흔히 장르라고 부르는 글의 종류에 따라서 읽는 방법이 달라진다. 어느 하루 동안에 읽게 되는 읽을거리들을 생각해보자. 아침에는 신문을 집어 들거나 혹은 인터넷의 뉴스사이트에 접속하여 그날의 사건들을 읽을 것이다. 우리는 이 기사가 사실이고 역사적으로 정확할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날 늦게 슈퍼마켓에 가서 계산대 앞에 서서 ‘외계인 뉴욕시 침범’이라는 타블로이드신문의 기사를 보게 되면 놀라지 않는데, 이는 그 기사가 사람의 주의를 끌려는(무언가를 사게 하려는) 장난 기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집에 가서 우편함을 열었는데 한 편지에 큰 활자로 ‘백만 불 당첨 축하!’라고 쓰여 있다면 이것도 역시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무엇을 사게 하려고 사실을 과장하는 ‘쓰레기’메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전기요금 고지서는 진지하게 받아들이는데 이는 만약 무시하면 전기가 끊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루 종일 끊임없이 글의 유형을 확인하고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결정한다.

그렇다면 복음서는 어떤 글인가? 복음서를 읽을 때 우리는 무엇을 찾아야 하는가? 복음서의 세 가지 특징이 이를 잘 읽고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복음서는 역사이며, 이야기 책이며, 신학이다.
현재 우리는 대략 5,500개의 완전한 혹은 부분적인 신약성경의 필사본을 가지고 있다. 그 중 한 완전한 필사본은 성경이 원래 쓰인 이후 최대 225년이 경과한 것이다. 가장 오래된 신약성서의 필사본은 AD 114년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이는 가장 오래된 필사본과 원본 간에는 최대 50년간의 역사적인 간격이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최대라고 한 이유는 신약성경 필사본 연구센터 Center for the Study of New Testament Manuscripts에서 일하는 Dan Wallace 박사와 그 연구 팀이 발견한 마가복음의 일부 기록이 적어도 1세기 이전 것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서는 우선 역사적인 기록이다. 이 말은 복음서는 구체적인 장소와 시간을 배경으로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을 기록하려 했다는 것이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전설이나 신화나 우화를 전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기록한 사건들을 실제의 일로 간주했다. 특별히 누가는 이 점을 그의 복음서 서두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복음서에 기록된 사건들을 주의 깊게 조사하였고 목격자의 증언을 구하였기 때문에 독자들은 전해들은 사건의 확실성을 의심할 수 없다고 하였다. 요한도 또한 목격자로서 증언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는데 “이 일들을 증언한 제자가 이 사

람이라 …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요한복음 21:24)라고 기록하였다.

이 이슈가 중요한 이유는 기독교의 진리는 이들 사건의 사실성 여부에 따라 부침을 겪었기 때문이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서 놀랄만한 주장을 펴셨다. 그는 자신을 메시야요 세상의 구원자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세상 죄에 대한 대가라고 규정하였다. 가장 중요한 복음서의 클라이맥스는 예수님의 부활인데 이는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을 확증하는 사건이다. 만약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다시 사시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가짜였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고린도전서 15:14)임이 분명하다. 복음서는 실제 일어난 사건을 기록한 역사적 산물이라는 것이 복음서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이다.

그런데 복음서는 특별한 역사책이다. 역사에 있었던 이야기들이며, 스토리로 전해 듣는 역사라 할 수 있다. 모든 스토리에는 줄거리와 등장인물과 배경이 있다. 스토리에는 줄거리가 있고 이에 따라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보통 갈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해결하여야 할 문제가 발생한다. 스토리는 클라이맥스에 이르고 해결책이 찾아진다. 이것은 복음서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예수님께서 무대에 등장하시고 자신에 대해 증거하신다. 사탄과 귀신과 종교지도자, 그리고 마침내는 로마 당국자의 도전을 받고 갈등이 고조된다. 네 복음서 모두는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사탄과 종교지도자를 적대자로 하는 구성을 보인다. 네 복음서 모두 이야기 전개의 정점은 십자가의 죽음이며 부활에서 해결책이 찾아진다.

네 복음서는 예수님의 동일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저자들은 각자의 독특한 방식으로, 그리고 독특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즉 등장인물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묘사하기도 하고 특별한 배경과 주제를 강조하기도 한다. 각 복음서가 어떻게 시작되는 지를 보면, 마태복음은 족보로 시작하면서 예수님이 왕실가문의 적자임을 확인시킨다. 마가복음은 세례요한의 설교와 예수님의 사역으로 시작한다. 누가복음은 역사가로서의 자질을 보여주면서 보통의 문학작품처럼 시작한다. 요한복음은 상당히 신학적인 서언으로 시작하여 예수님은 태초부터 존재하는 하나님의 말씀인데 우리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위하여 인간이 되신 것으로 설명한다. 각 복음서는 그 저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주제로 시작된다.
성령은 예수님께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함께 있을 것이라 약속하신 것이다(요한복음 14:16). 성령은 성경 저자들에게 영감을 부어주신분이다(디모데전서 3:16, 베드로후서 1:21 참조).
성령이 우리에게 하나가 아닌 네 개의 복음서를 주셨다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각 복음서 저자는 서로 비슷해 보이지만 각각의 고유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런데 교회역사에서 복음서들을 통합해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려고 하는 바람직스럽지 않은 경향이 있었다. 물론 이 시도는 모든 이야기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말하려고 하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성령은 삼위일체의 세 번째 하나님이다. 있었다. 이 시도가 위험한 것은 네 복음서를 오려내고 서로 붙여서 하나로 만들 때 각 복음서의 고유한 관점을 잃어버리거나 왜곡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이 네 개의 걸작들을 묶어서 하나로 만든다면 각 복음서가 교회에 주는 성령의 고유한 메시지를 잃게 될 것이다. 따라서 각각의 복음서의 문학적, 역사적 사실성과 고유성을 인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바로 이 관점에서 복음서들을 설명하는 세 번째 핵심 단어가 나온다. 복음서는 역사이고 이야기 책일 뿐 아니라 신학이다. 이 말은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세상의 구원자라고 철저하게 믿은 사람들에 의해 믿음의 영감으로 쓰인 문서라는 뜻이다. 이 점은 요한이 요한복음을 쓴 목적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요”(요한복음 20:30-31)라는 말 속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또한 누가도 독자들에게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누가복음 1:4) 하기를 원했다. 마태와 마가, 누가와 요한 모두는 그들이 말하는 것이 모두 참인 것을 굳게 믿었고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을 얻기를 원했다.


한 예수님의 네 가지 자화상


각 복음서가 각각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설명으로 복음서가 하나가 아니고 네 개인 이유를 알게 된다. 성령은 교회가 예수님의 다면적인 모습을 보게 되기를 원했다.

영화예술에 있어서 가장 놀라운 경험은 IMAX 영화이다. 여러 개의 카메라가 관객들에게 360도의 영상을 만들어 보여준다. 카메라가 도시와 산과 바다를 가로질러 보여주는 광대한 영상은 숨을 멎게 한다. 네 개의 복음서는 예수님의 모습을 360도로 기가 막히게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이시며 무엇을 이루셨는지를 완전하게 알 수 있다. 다음 네 개의 장에서 우리는 각각의 복음서가 보여주는 예수님의 독특한 모습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마태복음 읽기: 유대인의 왕 구세주의 복음서


내가 자랄 때 한 해 중 가장 기다려지던 날은 크리스마스였다. 나는 크리스마스의 모든 것을 좋아했다. 트리를 장식하고, 전구를 매달고, 터키 구이와 크렌베리 소스와 펌킨 파이 등등. 물론 성탄절 아침 트리 밑에 놓여 있을 장난감 선물도 당연히 기다려졌다. 추수감사절 무렵에 시어스 백화점에서 우편주문 카탈로그가 오면 우리 형제들은 먼저 차지해서 장난감 섹션에서 가장 갖고 싶은 것을 고르려고 뒤엉켜 싸우곤 했었다. 그 다음 달은 하루 하루 크리스마스가 빨리 오기만을 기다렸다.

마태복음은 크리스마스, 그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간절히 기다리는 이야기이다. 여러 세기에 걸쳐서 유대인들은 외부세력, 곧 아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그리고 그 당시 로마의 지배로 인하여 고통 받고 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압제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고 다시 그들의 땅에서 강대하게 해주시며 번영을 이루게 해 줄 그의 메시아를 보내주실 그 날을 갈망하고 있었다. 마태복음은 드디어 그 날이 왔다고 선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태복음 1:1).

마태복음은 아마도 첫 번째 복음서로 쓰인 것은 아닐지라도(마가복음이 첫 복음서로 추정됨) 신약의 맨 앞에 나오는 것은 오래된 관행이다. 왜냐하면 마태복음은 그 뿌리가 구약과 유대교와 가장 깊이 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구약의 제일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가 몇 세기를 건너 선지자의 바통을 마태에게 쥐어 주는 것과 같다. 그것을 받은 마태는 마침내 그 날이 왔다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마태복음의 핵심 주제는 약속과 성취 이다. 이스라엘과 세상에 구원자를 보내주리라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메시아 예수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이 성취의 주제는 마태복음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전개된다. 그 가운데 세 가지, 곧 족보와 성취의 공식과 예표를 살펴보자.


족보 (1:1-17)


서양에서 족보는 따분하고 재미없는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만든 성경 축약본에서는 이 족보의 대부분을 빼 버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태에게는 이 족보가 너무나 중요한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바로 예수님이 누구이시며, 무엇을 성취하셨는지를 보여주는데 핵심이 되기 때문이었다.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하면서 예수님을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 메시아”라고 확인해 주고 있다. 마태가 사용한 이 용어는 매우 중요하다. 메시아 라는 단어는 히브리어에서 왔는데 “기름 부은 자”라는 뜻으로 그리스어로는 ‘크리스토스 ’ 또는 ‘그리스도’로 번역된다. 기름을 붓는 것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특별한 임무를 위해서 지도자로(특별히 왕으로) 추대하는 한 방법이다. 유대교에서 ‘메시아’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택하신 마지막 때의 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다윗의 자손 이라는 칭호는 마태보다 거의 천 년 전에 하나님께서 다윗 왕에게 하신 약속을 생각케 한다. 즉 하나님께서 다윗의 자손 중 하나를 세워 그의 왕위를 정의와 정직으로 영원히 통치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이다(사무엘하 7:11-16). 이 ‘메시아 소망’은 이스라엘이 압제에 시달리고 억압을 받을 때에 선지자들에 의해서 수없이 언급된 것이다(이사야 9:6-7; 11:1-5; 예레미야 23:5-6; 33:15-16; 에스겔 37:24-25).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의 자손 ’이라는 말도 다윗 시대보다 또 수천 년 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생각나게 한다(창세기 12장; 15장; 17장).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기를 아브라함이 위대한 나라(이스라엘)의 아비가 되며 모든 나라가 그의 자손으로 인하여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메시아로서 예수님이 이스라엘뿐 아니라 전 세계에 구원의 축복을 주실 것이라 하였다.

이러한 타이틀과 족보는 전체적으로 예수님이 세상의 구세주로서 인간 역사의 최고점이 되심을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것이다.


성취의 공식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족보를 보여 준 것에 더하여 마태는 일어난 일들이 성경말씀이 성취된 것이라는 것,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와 그 이야기에 넘치는 의미를 부여하고 계시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마태는 열 번이나 “이것은 주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언급하였다.





이 밖에도 마태는 위의 경우처럼 확연하지는 않아도 다른 여러 곳에서 구약에 있는 말씀들이 예수님에 의해서 그대로 성취된 것을 언급하였다. 이렇게 많은 구약의 말씀이 예수님에 의해서 실제로 이루어졌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표적인 성취들’도 있었다. 이 말의 뜻은 그 기록들이 과거에 일어난 것을 기술한 것이라는 것과 그 일어난 것들이 궁극적으로 예수님에 의해 성취된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거나 미리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나 사건들의 이야기가 이 세상에 오실 메시아를 예견하는 것이었다(예를 들면 호세아 11:1을 참조).


예표


마태는 모든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도달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예표를 사용 하였다. 예를 들면 모세는 예수님의 전조이다. 모세가 어떤 산(시내산을 말함)에 올라가 돌 판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듯이, 예수님도 산 에 올라가서 그 유명한 설교를 하시면서(마태복음 5-7장) 새로운 약속을 선언하고 율법의 참 의미를 설명하셨다. 또 모세가 모세 5경을 썼듯이(창세기-신명기), 예수님도 마태복음에서 5개의 주요 설교를 하셨다(5-7장; 10장; 13장; 18장; 24-25장). 모세가 산에서 내려 왔을 때 얼굴이 빛났던 것처럼(출애굽기 34:29-33), 예수님의 얼굴도 해처럼 변형되어 빛났다(마태복음17:2). 여러 방식으로 예수님은 새롭고 모세 보다 더 훌륭한 인물로 묘사되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롭고 더 큰 약속을 가져오셨기 때문이었다(예레미야 31:31-34 참조).

마태는 또한 “새 이스라엘”의 예표를 발전시켰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때 그의 “아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데리고 나오셨듯이(호세아 11:1) 예수님을 헤롯 왕이 죽이려고 한 후에 애굽에서 옮기셨다(마태복음 2:15). 또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시험을 받으며 하나님을 떠났고, 예수님은 마찬가지로 광야에서 40일 동안 시험을 받았지만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이겨내셨다(마태복음 4:1-10). 이스라엘은 예수님의 (부정적인) ‘예표’였다. 비록 민족은 믿음이 없어 이교도를 향한 하나님의 빛이 되지 못하였지만(이사야 49:6), 예수님은 끝까지 믿음을 지켜 이스라엘의 참된 역할을 해내셨다.


유대인의 왕 구세주 … 그리고 열방의 주


마태는 그의 강한 유대교적인 관점과 선지자의 성취를 강조하면서 주로 유대인계 기독교인들을 위해 마태복음을 쓴 것으로 보인다. 믿지 않는 유대인들의 반발 앞에서 마태는 예수님이 유대인의 구세주로서 이스라엘의 약속을 이루실 분임을 증명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마태는 이러한 약속들이 오직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님도 분명히 했다. 예수님은 그의 공 사역에서 열두 제자들에게 오직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만 가라고 말씀하셨다(마태복음 10:5-6; ‘열둘’은 이스라엘을 상징함).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첫 번째로 기회를 얻은 자들로서 나중에 다른 국가들에게 빛이 될 수 있었다(로마서 1:16 참조). 예수님은 그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구원을 성취하시고 나서 그의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 을 제자로 삼으라는 ‘대 사명’을 주셨다(마태복음 28:18-20). 이스라엘을 위하여 준비된 구원이 이제는 모든 곳,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게 된 것이다.


마가복음 읽기: 고통 받는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


때때로 아주 재미있는 소설들은 그 구성에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대표적 추리소설 《그리고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사람이 살인자로 밝혀진다(독자를 위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음). 또한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에서도 이기적이고 자기 혐오적인 시드니 카튼이 놀랍게도 그가 싫어한다고 하는 사람(찰스 다르니)을 위해 교수대에 대신 섬으로 자기의 삶을 희생한다. 마찬가지로 <스타워즈>에서는 다스 베이더가 루키의 아버지로 밝혀졌다. 마가복음의 구성은 마찬가지로 이야기의 놀라운 반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놀라운 반전을 알고 나면 마가의 중심 주제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전능하신 구세주와 하나님의 아들 (마가복음 1:1–8:29)


마가의 복음서는 놀랄만한 속도와 에너지로 시작된다. 다른 복음서와 달리 마가복음은 긴 서론과 족보, 혹은 출생 이야기로 시간을 끌지 않는다. 몇 개의 짧은 문장에 이어 예수님이 곧장 등장하여 그의 공 사역을 시작하신다. 아주 짧은 한 개의 장 안에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사탄에게 시험을 당하고, 하늘나라를 선포하고, 사도들을 부르고,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어 쫓으신다. 마가는 때때로 ‘즉시’라고 번역되는 그리스어 ‘이투스’를 좋아했는데 42번이나 사용하였다. 물론 이 말은 항상 ‘바로 그때’를 의미하지는 않았지만, 한 사건에서 다음 사건으로 순식간에 넘어가는 연결사로 사용되었다. 마가복음은 마치 카페인처럼 우리의 관심을 빠르게 고조시킨다.

이 복음서의 핵심 사상은 ‘권위’이다. 예수님은 보통 사람과 다른 권위로 가르치셨다.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다. 권위로 어부들을 불러서 제자로 삼으셨고 그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은 귀신에게 떠나라고 명하셨고 귀신들은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1:1-26). 예수님은 단 한마디 말씀으로 병든 자를 고치신다(1:40-42). 사람들은 예수님의 능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예수님의 능력과 권위는 그 세기를 더해간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실 뿐 아니라 죽은 자도 살리신다(5:21-43). 폭풍이 그치도록 명하시면서 자연을 통제하신다(4:35-39). 이제 예수님은 귀신을 단 하나가 아니라 “군단으로”쫓아내신다(5:1-20). 그는 5천명(6:30-44)과 다음 4천명을 단 몇 개의 떡과 생선으로 먹이신다(8:1-10).

이러한 능력과 권위를 나타내신 목적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확인시키기 위하여 신비를 벗기기 위함이었다. 마가복음에서 자주 등장하는 질문 중 하나는 ‘그분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그 분은 누구인가? ’이다.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로 시작된다(1:1)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들은 그가 진실로 전능하신 구세주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드러내고 있다. 예수님의 신분은 이야기의 중간쯤에서 제자들에 의해서 확인되고 있다(8:27-38). 이 일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영적인 수양을 위해 갈릴리 북쪽에 있는 빌립보 가이사랴에 갔을 때 있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제자들은 “어떤 이는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아,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러면 너희는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셨고 이에 베드로가 나머지를 대신하여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대답한다.

옳은 대답이었다!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과 행동은 그가 정말로 그리스도이심을 베드로에게 확인시켰다. 그러나 베드로는 절반만 옳았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가 오신 것은 로마군대를 무찌르고 예루살렘에 왕국을 건설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고 더 많은 적을 대면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로마가 아니라 사탄이나 죄악, 그리고 죽음을 정복하려 오셨다. 아주 놀라운 반전으로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역할을 천명하셨다. 즉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마가복음 8:31).


반전: 하나님의 고통 받는 종(마가복음 8:31–16:8)


베드로의 답변에 대해서 예수님은 자신이 고통 받고 죽을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베드로는 이러한 부정적인 말씀에 예수님께 항변하였고, 예수님도 또한 베드로에게 즉시 질책하시면서 사탄의 편에서 말하는 것이라고 꾸짖으셨다(8:32-33). 그리스도의 역할은 세상 죄의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서 고통당하고 죽는 것이었다. 만약에 예수님이 죽으시려고 예루살렘에 가지 않으셨다면 세상은 여전히 사탄과 죄악과 죽음의 노예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나머지 이야기는 이러한 반전에 따라 진행되는데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고통 받는 역할을 완수하게 된다. 그러는 중에 예수님은 세 번이나 그의 죽음, 곧 ‘수난의 예언’을 하셨다(8:31; 9:31; 10:33-34). 그때마다 제자들은 그 예언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때마다 예수님은 이것이 섬기는 리더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이 이야기의 세 번째 줄거리가 이 복음서의 절정을 이룬다. 제자들이 왕국에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서로 경쟁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섬기는 리더가 무엇인지를 가르치시며(“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자신을 모델로 삼으라고 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 ”(10:45). 여기서 ‘대속물’은 죄의 대가를 의미한다. 섬김의 최종 행동으로 예수님 ‘한 분’은 ‘많은 사람들’의 죄로 인하여 죽으실 것이며 그 결과 모든 사람들은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이 구절은 이사야 53장의 예언을 상기시켜주는데,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이사야 53:5, 11).

예수님은 ‘의로운 종’으로서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므로’‘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셔서’사람들과 하나님을 갈라놓았던 담을 허무셨다.


마가복음의 목적과 독자


마가복음의 핵심 주제는 전능하신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주님의 종으로서 많은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인데, 이는 저자인 마가가 이 글을 쓴 목적과 잘 부합된다. 초대 교회의 구전에 의하면 마가는 이 복음서를 로마의 박해 받는 교회를 위해서 로마에서 썼는데 특별히 베드로가 전한 복음의 좋은 소식을 잘 전달하고 있다.

마가복음의 독자들이 가질 수 있는 두 가지의 커다란 관심사에 대해 마가는 그의 기록 전체에서 다루고 있다. 그 중 하나는,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이웃들에게 비록 예수님이 가장 죄질이 나쁜 범죄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처절한 고통과 굴욕의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셨지만, 그 예수님은 참 그리스도시요 구원자이심을 확신시키려 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엄청난 권위가 예수님이 과연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인가에 대한 의심을 떨쳐버리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죽음은 범죄로 인한 것이 아니요, 또한 비극도 아니고 우리들을 죄에서 해방시키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의 일환이었다.

둘째로는, 로마에 있는 교회는 그들의 신앙 때문에 극심한 박해와 심지어 순교도 당하였다. 따라서 마가는 예수님을 우리가 따라야 할 인내의 모본이라고 지적한다. 예수님이 고통과 죽음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켰듯이 모든 신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기꺼이 고통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처음으로 수난을 예고하신 후에 “누구든지 내 제자가 되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8:34). 예수님의 참 제자는 고통과 심지어 죽음에 이를지라도 예수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자이다. 마가복음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따를 제자의 신분도 동시에 요구한다.


누가복음 읽기: 모든 잃어버린 자를 위한 구세주의 복음서


영화관에서 나오면서, 혹은 책 한 권을 다 읽고 나서 ‘후속편이 있어야겠네’라는 생각이 든 적이 있을 것이다. 무언가 이야기가 다 끝나지 않은 것 같거나, 마무리가 덜 된 것 같거나, 좀 더 자세히 다룰 부분이 남았다거나, 해결할 문제가 남아있다는 느낌을 말한다.

누가복음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는 이 복음서의 마지막에 가서도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은 것을 아는 것이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두 권의 책, 하나의 작품


누가는 네 복음서 저자 중 유일하게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지?”라는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 두 번째 책을 집필한 사람이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나시고 승천하시기까지의 이야기인데 반해서,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떻게 같은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예수님의 구원의 소식을 예루살렘에서부터 땅 끝까지 전파했는지에 관한 이야기이다(사도행전 1:8). 사도행전의 첫 구절에서 누가는 그의 이전 책을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한”책이라고 말하고 있다(사도행전 1:1). 따라서 사도행전은 성령의 권능과 인도로 교회를 통해 예수님이 무엇을 지속적으로 행하시며 가르치셨는가를 기록한 책이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그래서 단순히 같은 저자가 기록한 두 권의 책이라는 의미 이상을 가진다. 이 두 권은 동일한 작업의 두 부분이다. 누가복음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사도행전의 끝에 가서야 비로소 마무리된다. 이러한 신학적이고 문학적인 단일성 때문에 학자들은 이 두 책을 표현할 때 하이픈으로 연결하여 ‘누가복음-사도행전’이라고 한다.


위대한 두 이동: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유대인에서 이방인으로


두 개의 위대한 이동이 누가복음-사도행전을 이끌어 간다. 그 첫 번째 이동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로마로 가는 지리적인 이동이다. 복음은 유대교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의 회당에서 시작되었다(1:8). 예루살렘은 누가복음-사도행전에 있어서 중요한 이중적인 역할을 한다. 한편에서는 긍정적인 역할인데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 있는 곳이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와 세상으로 전파된다고 예언되었다(이사야 2:3). 이스라엘은 열방의 빛이었고(이사야 49:6) 예루살렘은 그 빛의 상징이었다. 확실히 사도행전에서 교회는 구원의 소식을 ‘예루살렘에서 땅 끝까지’(사도행전1:8) 전하였다.

동시에 예루살렘은 다른 한편으로 부정적이고 악한 역할을 했는데 끈질긴 불순종의 민족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과거에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선지

자를 죽였고(누가복음 11:47-48; 13:33-34; 19:40-41), 마침내는 그리스도를 죽였다(사도행전 7:52). 이러한 이유로 그 도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파괴되었다(누가복음 13:34; 19:43-44; 21:20, 24).

예루살렘의 중요성은 누가복음의 ‘여행 이야기’(혹은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이 부분은 누가복음에서 그 구조가 매우 특이하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처음으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까지의 설명이 채 1장이 되지 않았다(마가복음 10:32-11:11).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9장 51절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10개의 장이 지나도록 아직 도착을 하지 못했다(19:45). 예수님은 이리 저리 다니셨지만 항상 시선은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었다(9:53; 13:22, 33; 17:11; 18:31; 19:11). 목적지인 예루살렘은 분명히 신학적으로 중요하였는데, 이는 예수님이 동족으로부터 배척을 당할 뿐 아니라 그가 이루실 구원이 그의 죽음과 부활로 완성될 것을 상징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은 전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의 이동을 한 이야기이고, 사도행전은 그 구원을 선포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부터 잃어버린 세상으로 향하는 교회의 이동에 관한 이야기이다(사도행전 1:8). 이러한 지리적인 이동은 또한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으로의 인종적인 의미도 동시에 가진다.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계획으로 이스라엘에서부터 시작된 구원이 땅 끝까지 전파되는 것이었다.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교회는 오늘날 구원의 시대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해준다.

이러한 특징은 누가복음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연속성 임을 말해준다. 여러 측면에서 연속성을 볼 수 있는데 구약과 신약 간의 연속성,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 간의 연속성, 오래된 약속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과 새로운 약속의 백성인 교회 간의 연속성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새로운 종교가 아니다. 이는 이스라엘을 통해 세상에 구원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연속하여 성취를 이루는 것이다.

열방을 위한 복음이 사도행전의 핵심 주제인데 이 주제는 누가복음에서도 여러 모양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1) 누가는 예수님의 생애를 로마황제의 지배 등과 같은 세계 역사의 사건에 맞추어 기록하였고(2:1;3:1), (2) 마태복음의 마지막 장에서 우리는 복음이 ‘모든 열방’으로 전파될 것을 알게 되는데(마태복음 28:18-20), 누가복음 2장에서도 보게 됨(누가복음 2:32). (3) 각 복음서는 이사야 40:3을 인용하여 세례 요한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설명하는데 누가는 이 인용을 40:5까지 더 연장하여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라고 말한다(누가복음 3:6, 이탤릭체는 강조하기 위함). (4) 마태복음에 기록된 족보는 유대 민족의 시작인 아브라함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1:1), 누가복음에서는 모든 인류의 조상인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 간다(누가복음 3:38). (5)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행한 설교의 주제는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축복하시기를 원하신다고 하는 것이었다(이 말씀 때문에 예수님은 거의 죽임을 당할 뻔하였다.4:24-30). 이와 같이 방식으로 누가는 예수님이 모든 인류의 구원자 임을 보여 주었다.


소외된 자를 위한 복음: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함


누가는 복음서에서 하나님께서는 주변인들을 사랑하셨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강조하였다. 예수님은 소외된 자들과 낮은 사회계층에 속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이들은 가난한 자, 병든 자, 귀신 들린 자, 죄인, 창녀, 세리, 나병환자, 사마리아 사람, 여자와 어린아이들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병사들과(23:34) 예수님 곁에 매달린 행악자를 용서해 달라고 구하였다(23:43). 예수님의 잘 알려진 비유는 누가복음의 ‘여행 이야기’(누가복음 9:51-19:27) 가운데에 잃어버린 자와 버림받은 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다. 예컨대 사마리아인(10:30-35), 대연회(14:15-24), 잃어버린 양과 잃어버린 동전, 탕자(15:1-32), 부자와 나사로(16:19-31), 끈질긴 과부, 바리새인과 세리(18:1-14) 등의 이야기에서 잘 나타나있다.

소외된 자들의 이야기의 절정은 삭개오인데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직전에 있었다(19:1-10). 삭개오는 단순히 누구나가 다 싫어하는 세리가 아니라 세리장으로서 가장 혐오스러운 존재였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그의 집에 초대해서 자기의 죄를 회개했을 때 예수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선언하였다. 참 하나님의 사람은 회개하고 믿음으로 돌아서는 사람임을 나타낸 것이다. 예수님의 다음의 말씀은 이 이야기의 절정을 찍을 뿐 아니라 모든 복음서의 핵심이 되는 말씀이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19:10). 누가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모든 곳의 잃어버린 자들의 구원자이시다.


요한복음 읽기: 아버지를 드러낸 아들의 복음서



요한복음과 공관복음


네 개의 복음서 모두 여러 가지 면에서 특별하지만, 특히 세 개의 복음서 마태, 마가와 누가복음은 서로 유사한 점이 많다. 우리는 이 세 복음서들을 ‘공관’복음(공관의 의미는 ‘함께 보다’는 뜻이다)이라 하는데 그 이유는 이 세 복음서들이 서로 많은 공통점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에 있는 대략 90%의 이야기들과 가르침들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나온다. 반면에 요한복음에 있는 10% 가량의 내용들만이 나머지 세 복음서에서 볼 수가 있다.

어째서 이런 유사성과 차이점이 있는가? 아마도 마태와 마가, 누가에게는 많은 자료들의 출처가 같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왜 요한복음은 다를까? 가장 신빙성 있는 대답은 아마도 요한은 세 복음서 저자들과는 여러가지 다른 상황과 환경 속에 있었을 것이고, 저술하는 시기 또한 나머지 복음서들보다 늦은 1세기 후반에 하였을 것이란 추측이다. 공관 복음서 저자들이 당면했던 가장 큰 과제는 과연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약속된 메시야였는지의 여부였던 것에 반해, 요한은 예수님의 완전한 신성과 인성의 문제에 집중하였다. 일부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은 단지 인간이었을 뿐 신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다른 이들은 예수님은 신이셨지만 인간의 형체로 나타나신 것이라 주장했다. 요한은 위의 잘못된 두 개의 주장들에 반박하였다. 오직 예수님께서 완전한 인간이자 완전한 신성이실 때에만 이 세상의 죄악을 구원하실 수 있다. 요한복음의 일관된 주제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할 이시라 (3:16 참조)라는 것이다. 우리는 몇 개의 성경 구절들과 이야기들을 통해 이 주제를 찾아보려 한다.


요한복음의 서문 (1:1-18)


요한복음의 서문은 신약에서 예수님을 가장 승격화시켜 표현한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1:1,그리스어로 로고스)으로 소개하고,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인류와의 소통을 위한 자라고 표현한다. 요한복음 1장 1-2절은 예수님을 놀랍게 묘사하는데, 그를 하나님과 구별하여 아들(그는 하나님과 함께 하였다)이라고 말함과 동시에 완전한 신성(그는 “하나님이셨다”)으로 나타내고 있다. 아들은 모든 것의 창조자이므로 진실로 신이라는 것이 확실해진다(3절). 하나님께서 빛과 생명을 창조하셨듯이(창세기 1:3, 20-26) 예수님께서도 역시 빛과 생명의 창조주이시며(요한복음 1:4) 육신의 삶과 영생의 삶을 동시에 주시는 분이다. 그는 사람의 형체를 지니고 이 땅에 와 주셨는데(10-11, 14절) 신학자들은 이 사건을 성육신 이라 부른다. 예수님께서는 본인과 같은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으셨지만(10-11절) 그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고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셨다.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의 영적인 자녀들이 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된 것이다(12-13절). 구약의 율법들이 우리의 죄를 지적했다면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그 죄에서부터 구해내셨다(16-17절). 요한복음 서문의 끝은 처음에 소개되었던 주제로 다시 돌아간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주듯이(1:1),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보이지 않던 하나님을 드러내준다(1:18).


일곱 개의 ‘기적들’


요한복음에서는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드러내 보이신다. 요한복음의 앞부분은(1:19-12:50) 그래서 ‘기적의 장’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 이유는 일곱 번의 기적을 통해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려는 사건들을 기록해 놓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일곱 번이라는 숫자는 대개 완전함 혹은 완벽함을 의미한다. 일곱 번의 기적을 행하시는 일화들과 함께 예수님의 정체성과 행적들을 비판하는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과의 대화와 토론이 지속적으로 나온다. 일곱 번의 기적은 다음과 같다.

  1. 가나의 결혼식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다, 2:1-11

  2.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다, 4:43-54

  3. 베데스다 못에서 병든 자를 고치시다, 5:1-15

  4.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시다, 6:1-14

  5. 물 위를 걸으시다, 6:16-21

  6. 태어날 때부터 눈이 안 보이는 자를 고치시다, 9:1-41

  7.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다, 11:1-43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첫 번째 기적의 결말을 통해 우리는 이 기적들의 목적을 알 수 있다.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신 첫 번째 기적을 통해 예수님은 영광을 드러내셨고, 그의 제자들은 그를 믿었다”(요한복음 2:11). 기적들을 행하심으로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났고 그를 향한 믿음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고집이 세고 강퍅한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은 오히려 반발심과 저항심을 불러 일으켰다. 가장 극적인 기적은 마지막에 행하셨던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일이다. 한편으로 이 기적은 많은 믿는자들을 만들어냈고(11:45) 모든 기적 중에 가장 위대한 기적인 예수님의 부활을 전조하는 사건이었다. 반면에 이 기적은 예수님을 십자가의 형에 처하도록 촉발시킨 사건이기도 했다(11:47-53). 그러나 이 부정적인 사건조차도 결국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겨 승리하시고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바뀐다.


일곱 번의 “나는”이라 하신 말씀


요한복음에 나타난 또 다른 중요한 예수님의 드러내심은 일곱 번의 “나는”이라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묘사하는 비유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1. 생명의 빵, 영적인 삶의 근원을 의미하심, 6:35, 41, 48, 50-51, 58

  2. 세상의 빛, 생명과 인도하심의 근원을 의미하심, 8:12; 9:5

  3. 양의 문, 위험으로부터의 보호를 의미하심, 10:7, 9

  4. 선한 목자, 제공자와 보호자를 의미하심, 10:11, 14

  5. 부활과 생명, 영생을 주는 자 됨을 의미하심, 11:25

  6.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참된 길을 의미하심, 14:6

  7. 참 포도나무, 영적인 건강함과 생명의 근원을 의미하심, 15:1


이 비유들 외에도 예수님께서는 때때로 자신을 완전한 의미의 “나는(I AM)”으로 말씀하셨다(8:58). 이는 출애굽기 3장 14절에 모세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셨던, 시작과 끝이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나는(I AM)”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로써 다시 한 번 예수님은 진실로 신성이시며 하나님을 드러내는 자이심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의 주제와 목적


요한복음의 주된 주제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다분히 기독론적이다. 요한복음은 확실히 네 복음서 중에 가장 신학적이지만 요한도 신학을 위한 신학은 쓰지 않았다. 다른 복음서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요한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복음서의 가장 중요한 목적을 명확하게 나타내는 구절은 이것이다.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1).

복음서들은 신학적, 문학적으로 보물들이며 각각의 특성이 있는 명작들이다. 그러나 영감을 받아 써내려 갔던 네 사람의 ‘복음전도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복음서는 그 이상의 것이다. 복음서는 하나님이 마지막 때주시는 구원을 믿음으로 받으라는 부름이며, 성령에 힘입어 변화된 삶을 살라고 초청하는 진실로 ‘좋은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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