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있는 기독론(19호)

작성자
odbkorea
작성일
2016-06-18 13:59
조회
1984
균형있는 기독론

발행인의 글

21세기에 한국 교회에 필요한 신앙은 균형 있는 신앙이다. 성경에도 말하고 있지만 너희는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인간은 주관적이어서 자기를 통해서 보고 듣고 만져 보고 나의 머리를 통해 정보를 수집해서 결론을 맺는다.

그러다 보니 잘 훈련되지 않은 마음은 수집되는 정보가 있어도 그 내용을 분석하고 종합하고 조직화하는 것을 잘 하지 못한다. 그 결과 좋은 정보에도 불구하고 주관적이고 편중된 결론을 내릴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양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단순한 판단을 한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교리라 하더라도 성경 전체에 걸쳐 종합적인 사고를 하지 않으면 균형을 잃은 신앙이 된다. 이단은 진리의 일부를 절대화하여 그것이 전부 인양 과장한 결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번에 발행하게 된 균형있는 기독론은 예수님에 대한 견해 가운데 외면상 상반되는 듯한 성경의 내용을 종합해서 대치시켜 균형 있는 기독론을 시도한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가르침이 역시 한쪽만 강조됨으로 신학적, 종합적 사고를 하지 않아 혼란을 일으키는 몇 가지를 골라서 균형 있게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래 서 예수님에 대한 가르침에 있어서 균형 있는 신앙을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책자를 출판하기 위해 수고해 주신 한국오늘의양식사 출판위원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한국오늘의양식사 발행인 김 상 복

 

 

성경에는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은 기쁨과 슬픔, 부드러움과 강함, 독립성 과 종속성, 전쟁과 평화를 함께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항상 변화하는 환경과 필요성에 우리가 다양 한 방법으로 적응할 수 있게 도와 주려는 것이 성경이 의도하는 목적이 될 수 있습니다.

전도서 3:1-4에서 솔로몬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을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 출 때가 있으며…”솔로몬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성경이 선한 목적으로 우리에게 용기를 주어 부수게도 하고 세우게도 하며, 웃게도 하고 울게도 하며, 치유 받게도 하고 죽게도 하는 것입니다. 이들 상반되는 진리에 대처하는 방법을 이해할 때에 영적 성장에 도전이 될 것입니다. RBC 의 선임 편집위원인 허브 밴더 룩트 목사님이 상반 되는 성경의 개념들을 가지고 기독론에 대한 지식을 더욱 확실하게 해주기 위해 이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삶을 변화시키는 진리인“하나님의 뜻”을 (행20:27) 더 잘 이해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 마틴 디 한 2세

 

 

1.부활 성으 해할 문제입/믿음 입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 2:32).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열두 제자에게와… 오백여 형제에게… 야고보와… 모든 사도에게와… ”(고전 15:3-7).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롬 8:24).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공부를 많이 한 크리스찬 지도자들 중에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역사적, 논리적 증거를 아주 자세하게 제시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변증론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과 마찬 가지로 예수님이 사망을 이겼음을 믿는 다른 신학자들은 이런 증거에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믿음으로만 받아

들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어느 의견이 옳을까요? 두 견해가 다 옳을까요?

부활은 이성으로 이해할 문제입니다
  1.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 당시에 이미 보고가 되었으며 아주 잘 입증된 역사적 사건입니다. 가치가 인정된 수천의 필사본에 역사적 기록으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눅 1:1-4; 고전 15:3-8).

  2. 사도들의 변화된 삶은 예수님이 진실로 사망을 이긴 것을 믿는 그들의 믿음을 강하게 증거합니다(행 2:14-40; 3:11-4:21; 비교 요 18:15-18, 25-27).

  3. 초대 교회는 부활의 말씀 위에 세워 졌습니다 (행2:22-36; 3:13-15; 4:8-10).

  4. 기원 후 100년이 되기 훨씬 전에 유대인들의 안식일 대신에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신 일요일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행 20:7; 고전 16:2).

  5.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이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진리라는 논리를 전개했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복음은 헛된 것이 되고 바울은 거짓말장이가 되며 크리스찬은 속임을 당한 것이 되고 따라서 아무런 소망도 없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고전 15:12-19).

부활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1. 역사적 사건들은 그 성격상 실험실의 실험 결과와 같을 수는 없는 것으로써 과학적으로는 증명될 수가 없습니다.

  2. 죽은 사람이 부활하는 것은 과학의 법칙에 어긋나기 때문에 역사적 증거가 아무리 확실하다고 해도 그것을 믿는 데에는 한 걸음 나아가 믿음이 필요하게 됩니다.

  3.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조건으로 믿음을 요구합니다. 믿음은 볼 수 없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롬 8:24, 25; 히 11:1, 6).

해설

예수님이 부활 한지 50일이 지나 베드로는 유대인의 무리에게 설교하기를 모든 사도들이 부활한 구주를 본 증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을 쓴 누가도 이 사건을 보고하면서 자기는 실제로 있었던 일에 대하여 정확히 전달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길게 설명을 했습니다 (눅 1:1-4; 행 1:1-3). 진보적인 학자들도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예수님이 부활한지 겨우 35년 안에 썼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5:1-11에서 바울은 반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 부활의 역사성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한 예수님을 본 여러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 있었고 그들이 본 것을 증언할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부활에 대한 직접적 증언으로 오늘날의 법정에서도 채택될 수 있는 증거입니다.

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증언에는 진정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맹목적이고 비이성적인 믿음의 도약을 요구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모든 증거와 논리는 과학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크리스찬이 아닌 사람에게 실험실의 증거로 증명된 어떤 것을 믿으라고 하는 것처럼 부활을 믿으라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신약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부활하신 사실을 확실하게 말하면서 믿음의 필요성도 강조했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소망에는 믿음도 함께 들어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만약 그것이 과학적 증명에 근거한 소망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소망이 아닙니다 (롬 8:24-25). 더 나아가 히브리서 저자는 복음의 역사적 타당성을 시인하면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에 비로소 믿음의 첫 걸음을 떼 는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11:6).우리는 믿음과 이성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이성 을 사용하여 이해할 수 있는 것만큼 이해를 하고 나머지는 믿음을 사용하여 건너 뛰는 것을 말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이성을 사용하는 동시에 믿음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F. Bruce 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의 사고의 과정을 거친다 해도 사실상 하나의 도덕적 결정 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성령이 우리의 영혼에게 증인이 되어 주실 때에 확신이 오는 것입니다 (롬8:16,17).

결론

우리는 예수님 부활의 역사성을 입증하는 확실한 증거들이 있기 때문에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믿는 데는 믿음을 사용해야 합니다. 합리적인 믿음이라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하겠지만 믿음은 믿음입니다.

적용

ㅇ 우리는 우리가 전도하려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우리의 믿음에 대한 좋은 간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벧후 3:15).
ㅇ 우리는 경험적인 증거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할 수는 없기 때문에 상당한 믿음을 가지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사람들을 격려해야 합니다.
ㅇ 우리는 순종하는 삶으로 언제나 성령에 의지함으로 성령이 내 안에서 증거하시는 데 따라 믿음의 확신 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롬 8:16,17).

 

2.예수님 우리 오셨습니/죽기 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요 14:9).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벧전 2:21).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
“나는 선한 목자라…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고전 15:3).

 

예수님에 대한 유명한 책이나 영화는 예수님의 모범적인 삶을 강조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 에 대하여는 불시에 일어난 하나의 불행한 사건으로 그립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많은 보수적인 크리스찬들은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에 대해서는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십자가와 빈 무덤에 대해 주로 초점을 맞춥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살기 위해 오셨나요, 아니면 우리를 위해 죽기 위해 왔습니까? 어느 쪽일까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살기 위해 오셨습니다
  1. 그는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으로 살아감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요 14:9).

  2. 그는 인간의 삶을 몸소 살아감으로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지를 보여 주었습니다(요일2:6).

  3. 그는 고난과 죽음 앞에서도 비참해 지거나 보복하려 하거나 불평을 하지 않는 삶을 삶으로서 인생의 문제들을 인내하며 사는 길을 보여 주었습니다(벧전 2:21-23).

  4. 그는 완전한 삶을 사는 것으로 우리의 구세주가 될 수 있었습니다 (히 5:8, 9).

  5. 그는 유혹 앞에서도 순종의 삶을 사는 것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을 보여 주었습니다 (마 4:1-11;히 2:18;4:15).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기 위해 오셨습니다
  1. 구약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그의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시 22;사52:13-15; 53).

  2. 그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천사가 동정녀 마리아에게 전한 말씀을 이루어 우리의 구주가 되는 길이었습니다 (마 1:21; 히 2:14, 15).

  3.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세례요한이 사역을 시작하면서“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라고 선언할 때에 시작되었습니다 (요1:29).

  4.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은 그의 공생애 초기부터 그가 이 때를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으로 그의 마음 속에 있었습니다 (요 2:19-22; 10:11,17, 18; 12:23, 27; 13:1; 16:32 17:1).

  5. 씨앗이 죽어서 식물이 자라나는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죄인의 구원을 위해서 필요했던 것입니다 (요 12:24, 32, 33).

해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살았습니다. 그는 삼십 년 조금 더 되는 기간 동안 하나님을 보여 주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빌립에게 그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했습니다(요 14:9). 요한은 우리에게 우리도“예수님이 살았던 것 같이 살아야 한다”고 말함으로 우리 삶의 기준을 제시 했습니다 (요일 2:6).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이 부당한 취급을 당함으로 어떻게 고난을 받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고 말했습니다 (벧전 2:21). 그가 우리를 위해 죽기 위해 오신 것도 역시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막 시작했을 때 세례요한은 그를“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에게 다가올 희생양으로의 죽음을 암시한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죄인을 위하여 대신 죽을 그의 죽음을 예언하고 있습니다(시 22; 사 52, 53). 예수님은 자신을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좋은 목자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예수님이 죽은 이유를 (고전 15:3) 말했습니다. 곧 그 말은 거룩한 하나님의 손에 있는 우리가 받아 마땅할 죄의 대가를 지불했다는 것을 말합니다(롬 6:25).

결론

여러분이 아는 것처럼 성경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를 위해 살기 위해 오셨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죽음이 없는 그의 삶이나, 삶이 없는 그의 죽음은 우리의 완전한 구원을 위해 적합하지 않습니다.

적용

ㅇ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며 예수님의 대속의 삶과 죽음으로 얻게 된 것임을 알아야합니다.
ㅇ우리는 온전하지 않은 삶에 만족하지 말고 예수님의 본을 열심히 따라야 합니다.
ㅇ우리는 우리의 선한 행동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를 표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을 구원 받기 위해 필요한 수단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3.예수님 화평 습니다/분열 시키려 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 14:27).
“아버지께서는…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 이라”(골 1:19, 20).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10:3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요17:14).

젊을 때 우크라이나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와 미국 시민이 된 한 노인이 크리스찬이 되어서 자기의 부모와 친 척들과 그 밖의 아는 사람들과 겪었던 심각한 마찰에 대해 말합니다.

그는 국립 교회에서 성장을 하였으나 성직자의 위선 때문에 무신론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강하게 불신앙을 선포하자 그의 가족들은 당황했지만 반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어느 날 한 크리스찬이 그의 무신론에 도전을 하였습니다. 몇 주일에 걸쳐 매일 모임을 가진 후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 날 저녁 집으로 돌아간 그는 부모님이 기뻐하실 것이라 생각하며 그에게 일어난 변화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놀랍게도 그의 아버지는 크게 화를 내며 그의 머리를 때리면서 집을 나가라고 명령했습니다.

그의 가족과 아는 사람들도 그에게 등을 돌렸으며 그의 고용주는 그를 해고했습니다. 이상하게도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살아 있는 믿음보다 무신론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는 임시직 일을 하면서 계속하여 핍박을 받다가 미국으로 도피할 수 있는 길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인간관계에 마찰과 분열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한 것이 이런것이었을까요 예수님은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었나요?

예수님은 화평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1. 스가랴는 예수님이 태어나기도 전에 메시야가“우리의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라고 예언했습니다 (눅 1:78, 79).

  2.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평의 기초를 쌓았습니다 (롬 5:1; 골1:20).

  3. 예수님은 그를 믿는 사람의 마음 속에 세상이 주는 것보다 훨씬 큰 평안을 줍니다 (요 14:27).

  4.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본을 따르라고 하였습니다. 곧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른 쪽 뺨을 돌려대며 (마5:39),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고 (마5:44), 화평케 하는 자가 되라고 하였습니다 (마5:9).

예수님은 분열을 시키려고 오셨습니다
  1. 예수님은 가족 관계에서“화평”보다는“칼”을 가져다 줄 때가 간혹 있습니다. 곧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믿는 사람을 미워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10:34-36).

  2. 예수님은 세상이 그를 미워하기 때문에,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이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요 15:18, 19; 17:14).

  3. 예수님은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눕니다. 곧 그를 영접하는 사람들과 영접하지 않는 사람으로 나눕니다 (요1:11-13).

  4. 예수님은 나중에 그를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영원히 분리시킵니다 (요 5:28, 29).

해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죄의 값을 치르고 죄인들이 거룩한 하나님과 화평을 이룰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골 1:19, 20). 예수님은 그를 의지하고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평안을 줍니다 (요 14:27).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 속의 평안은 영혼에 불안함이 없으며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사랑으로 함께 하심을 확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예수님은“내가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 는 믿음 때문에 가족이 불화하고 (35절),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되기까지 한다고 (36절) 자세하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은 종종 영접한 사람들을 미워합니다. 왜냐하면 영접한 사람들의 간증을 듣고 행동을 볼 때에 화가 나기 때문입니다 (요 17:14).

결론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과 화평케 하였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내적 평화를 누리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를 따르게 되면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내어 드리기를 거절한 사람들과 마찰을 일으키고 분리와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적용

ㅇ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마음속 평화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며 구원 받은 사람이나 구원 받지 못한 모든 사람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ㅇ 영적이지 못한 사람이나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과 마찰이 전혀 없으리라고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하는 것은 불순종하는 완악한 사람들과 불화를 초래합니다.
ㅇ 우리는 미움 받는 것을 기꺼이 참고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마 5:44).

 

4.예 스도 나님 아버지 동등합니/버지보 습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 8:58).
“아들에 관하여는‘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나이다’”(히 1:8).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2:52).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요 5:30).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요 14:28).

나이 든 한 남자가 그리스도를 믿는 자기의 신앙에 대해 말하는 한 젊은 여자의 말을 예의 있게 들어 주었습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있었던 그는 예수를 위대한 스승 이상으로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은 믿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초월적 존재는 한 분뿐이지요. 예 수님도 자신이 아버지만큼 크지 않다고 말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말에 젊은 여자는 답을 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예수의 신성과 예수가 아버지와 동등함을 항상 믿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어떤 성경 구절들은 예수님과 하나님이 동등하다고 분명하게 말하는 반면 다른 구절에서는 예수님을 낮게 여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합니다
  1. 그는 아버지와 똑같이 영원합니다. 그는“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사 9:6). 그리고 변함 없이“내가 있느니라”(“I AM”) 하였던 분입니다 (요 8:58).

  2. 그는 하나님이라 불리는 점에서 아버지와 같습니다 (요 1:1; 20:28; 딛 2:13; 히 1:8).

  3. 그는 주님이라 불리는 점에서 아버지와 같습니다(욜 2:32; 롬 10:13 히 1:10-12).

  4. 그는 만물의 창조자로 묘사되는 점에서 아버지와 같습니다 (골 1:16; 히 1:10 과 창 1:1, 26 비교).

  5.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이 때 사용한 단어는 그 시대 사람들에게 예수가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뜻을 지녔습니다 (요 5:18).

  6. 그는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말했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39).

  7. 그가 죄 사함을 행했을 때 보여 준 권능은 자신을 아버지와 동등하게 하였습니다 (마 9:1-8).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보다 낮습니다
  1. 예수님은 선언했습니다.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요 14:28).

  2. 예수님은 그 지혜가 자라났습니다 (눅 2:52). 그러나 아버지는 그 지혜가 무궁하십니다 (시147:5).

  3. 예수님은 피곤했습니다 (요 4:6). 아버지는 피곤치 아니합니다 (사 4028-31).

  4. 예수님은 그가 다시 오실 그 날과 그 때를 몰랐습니다. 아버지는 알았습니다 (마 24:36).

  5. 예수님은 아버지께 대한 의존을 확인하면서 말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요5:30).

  6. 예수님은 종종 아버지께 기도 드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마 14:23; 26:36; 눅 6:12; 요 14:16).

  7.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스스로 복종했습니다 (마26:39; 히 10:5-7).

  8. 예수님은 인류를 심판할 권리를 아버지로부터 받았습니다 (요 5:22, 23).

해설

성경은 예수님과 아버지가 근본적으로 동등하다는 것을 강하게 단언합니다. 요한복음 1:1에서“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고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되기 위해서 예수님은 어떤 한계도 없어야 합니다. 영원하고, 전능하고, 어디에나 계십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나기 영원 전에 그가 있었음을 선언하면서 자신을 출애굽기 3:14의 위대한“스스로 있는 자”와 동일시했습니다 (요 8:58).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그의“보좌가 영영한”(히 1:8) 하나님과 동일시했습니다.

논리적으로 말해서 삼위일체의 세 사람은 서로 동등하고 서로 영원한 것입니다.

한편 땅 위에 사람으로 온 예수님은“그 지혜가 자라고”(눅 2:52), 아버지께 의존한다는 것을 말하였고(요 5:30), 아버지가 자신보다 더 크다고 선언했습니다(요 14:28). 예수님이 이렇게 말한 것은 사람이 되면서 하나님으로서의 그의 것이었던 권리와 능력과 영광들을 스스로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 유혹과 고난과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죽음까지도 견뎌 내는 사람으로 완벽하게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그는 완전히 우리와 같게 되어 기적을 행하기 위해 성령을 의지했고 (마 12:28) “영원한 성령”(히 9:14)을 통하여 갈보리에서 자신을 희생으로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에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이었습니다. 지금 하늘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을 입은 사람의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행 1;9-11; 2:29-33; 히10:12, 13). 그는 여전히 한 인격으로서 하나님이며 동시에 사람입 니다 (골 1:15-20; 히 1:1-12). 그는 세상에 사는 동안 당했던 수치를 더 이상 당하지 않습니다. 육신을 입은 그는 한번에 한곳에만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성령과 함께 삼위일체가 되신 그는 어디에나 계십니다 (마 28:19, 20).

결론

예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아버지와 동등합니다.

그러나 인간 세계의 한 구성원이 되면서 그가 독립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신성의 권리와 능력을 잠시 옆으로 밀어 둔 것입니다.

적용

ㅇ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것을 깨달음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올려 드려야 합니다.
ㅇ 우리는 영원하신 삼위일체 가운데의 두 번째 인격이 영광을 입은 몸으로 살아 계신다는 하나의 커다란 불가사의를 겸손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ㅇ우리는 비록 제약을 받는 피조물이지만 언젠가는 영광을 입은 몸을 받아 예수님처럼 될 것을 확신할 때에 기쁨이 있습니다 (요일 3:1-3).

 

5.그리스도 자입니다/ 자입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7).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요1:14).
“그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골 1:15).

“그 이름은…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할 것임이라”(사9:6).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의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 5:2).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 8:58).

교회에 출석하는 젊은 엄마 수잔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배워 그렇게 믿어 왔습니다. 그러나 집집을 방문하는 큰 종교 집단의 회원 두 사람이 그녀가 지닌 예수그리스도의 개념에 도전을 했습니다. 그들은“성경은 예수님을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영존하지 않는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이 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또 성경에서 예 수님을“독생자”라고 부르고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수잔은 혼돈이 되어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그리스도는 먼저 나신 자이며 독생자입니다
  1. 그는 어느 특정한 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시 2:7).

  2. 그는 많은 형제와 자매가 있는 큰 가족의 맏아들입니다 (롬 8:29).

  3. 그는 가족 중에서 가장 먼저 나신 자의 자리에 있습니다 (골 1:15).

  4. 그는“독생자”입니다 (요 1:14, 18; 3:16,17; 요일 4:9).

그리스도는 영원합니다
  1. 이사야는 그에게“영존하는 아버지”라는 이름을 드렸습니다 (사 9:6).

  2. 미가는 오실 메시야의 근본은 태초라고 예언했습니다 (미 5:2).

  3.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구약에서 계시된 불변하는 여호와로 존재해 왔음을 선포했습니다 (요 8:58 과 출3:14 비교).

해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삼위일체의 두 번째 인격으로 존재하셨습니다. 이사야 9:6에서 그는 영원한 존재라는 뜻을 가진“영존하는 아버지”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미가 5:2에서는“그의 근본”은 영원이라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고 선언합니다.

예수님이 직접 선언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 8:58). ‘내가 있느니라’라는 표현은 그가 시간을 초월하는 존재임을 말하며 또한 출애굽기 3:14에서 말하는 영원하고 불변하는‘여호와’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독생자’나‘먼저 나신 자’라는 단어들은 예수님이 영원히 계심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7) 라는 선언은 사무엘하 7:14에서 하나님이 다윗에게 한 약속을 근거로 한 말씀입니다. 이 단어들은 다윗의 계보에서 왕관

 

 

6.그리스도가 우리의 죄 값을 치루었습니다/우리가 우리의 죄 값을 치룹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 리신바 되셨고" (히 9:27,28).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하사"(골 1:21,22) "스스로 속이지 말라…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후 5:10)

부유한 크리스찬 사업가 랠프는 비서와 연애를 하는 관계에 빠졌습니다. 비서를 데리고 자주 점심 식사도 하고 비싼 선물도 사주였습니다.

메리는 이런 호의를 즐기면서 크리스찬으로 직장을 가진 그의 남편이 벌어 오는 수입이 너무 적어 자기는 더나은 인생을 부당하게 사기 당하고 있다고 자신에게 말하는 것으로 양심을 달랬습니다. 교회의 선배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랠프와 메리는 각각 배우자와 이혼하고 서로 결혼을 했습니다.

2년이 못되어 랠프의 몸에 이상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해 온 일들을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은 죄의 결과로 고통을 당할 것이라고 말해 주었던 한 친구의 경고가 생각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기 죄에 대한 모든 벌은 예수님이 벌써 치렀다는 사실만 믿고 너무나 멀리까지 갔던 것입니다.

그의 새 아내도 역시 너무 불행했습니다. 돈으로 살수 있는 것들이 그녀가 기대했던 즐거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하지도 않는 병든 남편을 돌보아야 하는 덫에 걸렸다고 느껴졌습니다.

이 두 사람은 자신의 죄 값을 치르는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값을 치우었다는 생각과는 어떻게 조화를 이룰까요?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 값을 치루었습니다
  1.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지기 위해 돌아 가셨습니다(요 1:29). 그리고 우리를 정죄함에서 풀어 주었습니다.(롬 8:1)

  2.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죄 값을 단번에 지불하는 근거가 되고 (히 9:25-28: 10:10-18), 그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온전히 새롭게 설 자격을 받습니다 (롬 4:25)

  3. 예수님의 피 흘림으로 우리의 죄는 용서 받을 수 있고 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없습니다 (마 26:28; 롬 3:21-26; 5:6-11)

  4. 예서님의 죽음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이" 설 수 있게 합니다 (골 1:21, 22)

우리가 우리의 죄 값을 치롭니다
  1. 모세는 화를 내고 불순종하였던 그의 죄 값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를 못했습니다 (신 32:48-52'34:1-12)

  2. 죄는 신자와 불신자 모두에게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고 성경은 경고합니다 (갈 6:7,8)

  3. 주의 만찬을 불성실하게 지킨 결과 병들거나 죽은 자가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 가운데 생겼습니다 (고전11:27-30)

  4.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용서 받은 사람들도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섭니다 (고후 5:10)

해설

우리가 지은 모든 죄에 대한 벌은 그리스도가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가 많은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자기를 드리신 것 같이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완전한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은 다시 온다고 히브리서 9:27, 28에서 말합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1:20-22에서 그리스도가 삽자가에서 죽음으로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에 화평을 이루었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진리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반복됩니다.

그리스도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의 진노를 완전히 감당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거룩하신 본질 을 거스르지 않고 우리를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의 심판관인 하 나님은 우리를 의롭다 칭하시고 그의 가족으로 받아 주십니다. 요한일서 1:9에서 말하는 용서는 하나님과 우 리의 새로운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의 아버지인 하나님은 매일의 죄를 제거하여 하나님이 우리와 교재 하는데 죄가 장벽이 되 못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믿는 자로서 죄를 지어도 벌받지 않 는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경고 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심은 대로 거둔다고 말했습니다. (갈 6:7)

하나님은 죄를 지었을 때 가정 파탄, 성병, 경제적인 어려움, 병든 삶 같은 필연적인 결과가 크리스찬의 삶 속 에서 일어나는 것을 허락합니다. 더 나아가서 이 땅에서 아버지가 불순종하는 아들에게 징계하는 것처럼 우리를 징계합니다. (히 12:6)

예를 들면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은 죄 짓는 생활방식에서 돌이키지 않는 크리스찬에게 고통과 가난과 죽음 까 지 가져다 줍니다 (고전 11:30-32)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우리가 고백하지 않고 버리지 않은 죄들을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다루실 것입니다. 모 든 크리스찬은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기 위해" 심판대에 섭니다 (고후 5:10). 그러나 이것 은 처벌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상급을 결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우리가 살아온 삶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결론

심판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 값을 완전히 치루었기 때문에 우리를 죄 없는 사람으로 봅니다. 그런 의로우신 아버지는 우리가 불순종할 때 징계를 내려 우리가 지은 죄에 따른 당연한 결과를 거두게 합니다.

적용

ㅇ 우리 믿는 자가 알면서도 죄를 지어 넘어지거나 연약함 때문에 실패할 때에도 절망하거나 지옥으로 가는 정죄함을 받는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 값을 완전히 치루었습니다.
ㅇ 하나님의 은혜만 믿고 죄에 빠진 삶을 살면서 하나님을 만흘히 여기면 슬픈 결과를 거두게 됩니다 (갈 6:7,8 참조)
ㅇ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생각을 알고 모든 말을 들으며 모든 행동을 관찰한다는 것을 마음속에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가 살아온 삶이 평가 받는다는 것(고후 5:10)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7.예 스도 독생입니다/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요 3:16)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였으니…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언사보다 뛰어남이라" (히1:2-4).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욥 1:6)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요일 3:2)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9갈 3:26)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오래 동안 기독교의 가르침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가끔 천사들과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말합니다" 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바울이 사도행전 17:28에서 이방의 철학자들에게 말할 때 그 철학자들 중 한 사람의 말을 인용하여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고 한 것을 지적합니다. 천사들과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하였는데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입니다
  1. 특별히 그는 "유일한" 아들이라고 불립니다 (요 1:18, 3:16,18: 요일 4:9).

  2. 그는 그의 아들 된 것으로 유일합니다. 아들 되심 안에서 그 만이 아들이며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며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고 능력으로 "만물"을 붙드는 자"이며 "죄를 정결케 하며"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아 있습니다 (히 1:1-3)

  3. 그는 선지자와 다릅니다. 선지자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셨던 하나님은 이제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히 1:1,2)

  4. 그는 천사와 다릅니다. 그는 아들이며 "하나님"이라 불립니다. 그는 만물을 함께 지으셨다는 인정을 받으며 그의 영원함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히 1:5-14)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가 아닙니다
  1. 천사들도 하나님의 "아들들" 이라 불립니다 (욥 1:6: 2:1)

  2. 이스라엘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은 "사신 하나님의 자녀"로 (호 1:10). 전체적으로는 "내 아들"이라 불렸습니다 (호 11:1)

  3.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배운 것은 (마 6:9) 우리가 그의 자녀임을 말합니다.

  4.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났으므로 그의 자녀들이라 불립니다 (요일 3:1, 2, 10: 5:1,2)

  5. 우리는 하나님께 입양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입니다. (롬 8:14-16: 갈 4:4-7)

  6.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이 확실합니다 (히 2:10, 11)

해설

요한복음 1:18, 3:16과 18, 그리고 요한일서 4:9와 같은 구절들은 예수님을 "독생자"라 부르며 그의 유일성을 강조합니다. "독생자"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유일한 아들", 혹은 "한 분이며 유일한 아들" 이란 말이 도 잘된 번역입니다. 히브리서 1:1-3에서 기자는 예수님의 아들 됨은 모든 피조물과 천사들과는 다르다고 지적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며 지음을 받은 어떠한 것으로 설명해서는 안돕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의 아들 되심은 절대적으로 유일합니다.

욥기 1:6에서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립니다. 그렇게 불리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능력과 하나님께 순종하든 불순종하든 선택의 능력을 갖추어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3:2에 믿는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적절한 용어 입니 다. 천사들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들"로 지움을 받았지만 우리는 죄 때문에 가족 관계를 깨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새 생명을 얻으므로 우리는 구원 받은 하나님의 가족이 됩니다.

갈라디아서 3:26에서 바울이 말한 "믿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다는 것은 성숙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의 지위, 즉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후사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 사도가 말한 우리의 "양자됨" (롬 8:15. 23: 갈 4:5)은 온전한 후사된 권리와 특권을 우리에게 주는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결론

모든 도덕적 존재는 하나님의 지으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받는 자들은 그의 영적 가족 구성원으로서 그 자녀들이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만 유일하고 영원한 아들이며 삼위일체의 두 번째 인격입니다.

적용

ㅇ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이므로 하나님의 가족인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도록 추구해야만 합니다.
ㅇ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님의 형제 자매로서 우리는 영원한 영광을 확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8.그리스도 계십니다/ 그리스도 습니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서…" (요 17:23)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 2:20)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라" (골 1:27) "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 15:22)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전 4:16)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고후 5:17)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가 계신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도 말합니다. 이것은 서로 모순되는 말로 들립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가 "우리 안"에 있게 할 수 있을까요 이 어려움을 풀기 위해 어느 크리스찬 만화가는 생쥐가 스위스 치즈 조각 안에 있는 구멍 속에서 내다보며 "나는 치즈 속에 있다"고 말하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다음 그림에서는 이 생쥐가 불룩한 배를 보여 주며 "이제 치즈가 내 안에 있다" 라고 말합니다.

이 그림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에 대한 것은 시간적으로 전후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 쪽 상황이 다른 쪽 상황의 뒤를 이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동시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1. 아버지가 아들 안에 있는 것처럼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요 17:21-23)

  2. 그리스도는 우리의 죽어 가는 육신 안에 살면서 죽지 않는 생명을 우리에게 줍니다 (롬 8:10, 11)

  3. 그리스도는 부활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있도록 해줍니다 (갈 2:20)

  4.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살면서 우리가 성령 충만한 삶을 살 때 완전히 편안함을 느낍니다 (엡 3:17)

  5.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 안에 살면서 소망의 근원이 되십니다 (골 1:2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1.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미래의 육체의 부활이 보장됩니다 9고전 15:19-23: 살전 4:16)

  2.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타락한 백성의 하나였던 우리의 죄가 사라지고 하나님 가족의 일원이 됩니다 (고후1:21; 5:17).

  3.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을 완전히 나타내지도 못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지도 못하는 율법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고후 3:14-18)

  4.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세례를 받는 것으로도 설명이 됩니다. 곧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 지냄, 부활의 사건 속에 우리가 동참하는 것을 뜻합니다 (롬 6:1-11; 갈 3:27)

  5.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 땅에서 천국을 얻고 경험하는 즐거움을 누릴 권리를 얻게 됩니다. (엡 1:3)

해설

예수께서 "내가 저희 안에 저희가 내 안에 있다" (요 17:23) 고 말한 것은 그를 믿는 자에게 들어가서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님 사이와 같은 관계를 이룩하신다는 진리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진리를 바울은 갈라디아서 2:20과 골로새서 1:27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는 우리의 삶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변화시키고 하늘에서 그와 함께 누릴 궁극적인 영광을 확신 시켜 줍니다. 이것은 삶을 바꾸고 위로해 주는 진리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이 다시 올 때 살아 있는 믿는 자가 하늘에 오르기 전에 일으켜 세워 져서 (살전 4:16) 영광된 부활의 몸을 입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고전 15:20).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 심을 받아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우리의 율법상의 위치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고린도후서 5:17 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아담의 후손으로 아직도 구원 받지 못하고 정죄 받을 위치에 있는 사람과 대조하여 구원과 영광을 받도록 예정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은 그가 우리 안에서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 로 거룩하게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있다는 것은 우리의 새로운 위치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거룩해 진 지위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 그는 우리의 삶에 들어와 속으로부터 우리를 완전히 변화 시킵니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심판자 하나님은 죄인으로 서 있던 우리를 데려다가 죄가 없다고 선언하고 우리를 받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적용

ㅇ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는 진리는 큰 위로와 확신을 줍니다. 우리는 우리의 허물과 죄를 보지 않는 그리스도 하나님 앞에 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로 옷 입혀 진 우리를 봅니다.
ㅇ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다는 진리는 거룩한 삶을 살도록 이끌어 줍니다. 세상과 육신과 마귀를 이길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주는 것입니다.

 

9.그리스도 입니 /주님입니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리라" (사 53:11)
"…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마 20:28)
"종의 형체를 가진… 그리스도 예수" (빌 2:5, 7)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 시니이다!" (요 20:28)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행 2:36)
"이름 쓴 것이 있으니…'만왕의 왕이요 만 주의 주라' 하였더라" (계 19:16)

지난 몇 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되신 것을 강조하는 기독교 서적이 많이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들은 예수님이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 서로를 섬기는 새로운 방법의 삶을 본 보이기 위해 왔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책을 쓴 사람들은 다락방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신 예수님이 일어나 수건을 들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준 요한 복은 13:1-11에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 책들은 우리 주 예수를 종으로 모든 믿는 자들의 본이 되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권위와 그의 주님 되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이 종이 아니라 하나님이며 주님이며 왕이라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또 창조주인 그리스도의 권능과 심판자의 역할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의 주권뿐만 아니라 그가 세운 세상의 정부 지도자들, 고용주, 목회자, 남편들, 부모들의 권위의 계보까지도 강조합니다.

그러면 어느 쪽이 옳을까요? 종으로 오신 그리스도와 최고의 권위를 가진 주님이신 그리스도 중에서 어떤 쪽 에 더 무게를 실어야 할까요?

그리스도는 종입니다.
  1. 구약성서에서는 그리스도를 장차 오실 종의 모습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사 42:1;52:13;53:11; 슥3:8)

  2. 예수는 자신이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마 20:28) 섬기러 온 자라고 말했습니다 (눅 22:27)

  3. 바울은 예수께서 종의 역할을 선택하셨다고 말했습니다 (빌 2:7)

  4. 예수님은 자신을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종으로 말했습니다 (마 11:28, 29).

그리스도는 주님입니다
  1. 예수님은 만 왕의 왕이요 만 주의 주라고 불립니다 (계 19:16)

  2. 도마는 예수의 상처를 보았을 때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소리쳤습니다 (요 20:28)

  3.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에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라고 말했습니다 (행 2:36)

  4. 기도 드릴 때 사람들은 예수를 주님이라 불렀습니다 (행 7:59,60; 살전 3:11; 살후 2:16; 3:16)

해설

예수님이 종으로 온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면의 하나입니다. 이사야 52:13에서 53:12에 보면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지고 그를 아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고난의 종입니다. 빌립보서 2:5-11말씀에서 바울은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서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며,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과, 세상의 구원자와 왕으로서의 영원한 영광과 높임을 받는 우리 주 예수의 여정을 차례로 설명합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22:27과 마태복음 20:28에서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선언하면서 자신의 역할을 낮추어 설명한 것을 봅니다.

종의 역할을 감당한다고 해서 예수님이 하나님보다 낮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도마는 예수를 "나의 주시며 나 의 하나님" (요 20:28) 이라고 올바르게 고백했습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이 예수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사실을 설명한 후에 예수님을 높여 "주와 그리스도"라고 (행 2:36) 선언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계시록 19:16 에서 만 왕의 왕이요 만 주의 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지도자나 주권자와 섬기는 자를 혼합할 때 혼란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권위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하 나님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권위를 자기만을 위하는 입장에서 봅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은 종의 역할을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방편으로 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하게 될 것과 우리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는 일이 불가피하게 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자유로운 도덕적 존재로 만들기로 결정하신 사실에서 그리스도의 종의 성격이 나타납니다.

우리를 위해 종의 자리로 내려간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 우리도 역시 그의 주권 아래 자리할 수 있습니다. 자 신의 권능을 우리를 위해 사용하시는 주님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결론

영원한 삼위일체의 둘째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주님이십니다. 그는 스스로 하늘을 떠나 사람의 가족으로 와서 종의 역할을 감당했을 뿐만 아니라 죄의 권세와 형벌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하였습니다.

적용

ㅇ 우리 주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위해 몸을 굽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13:15)
ㅇ 우리의 구세주가 악한 사람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어 당하게 될 일들에 대해 말한 것은 우리에게 이런 경고를 한 것입니다.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 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요 15:20)
ㅇ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예수님은 이렇게 말하면서 그의 종의 도를 본 받으라고 우리에게 용기를 줍니다 (눅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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