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하나님에 대한 회의론자들의 질문들(45호)

작성자
한국오늘의양식사
작성일
2017-05-14 16:48
조회
9523

발간사


어느 날 한 모임에서 자신을 신학대학생이라고 하며 여학생 한 명이 일어나서 구약의 하나님은 잔인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다고 항의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질문이 자주 있는데 이번에 발간한 이 소책자가 그와 같은 몇 가지 의문에 대해서 명쾌한 답을 제시해 줍니다.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동일한 하나님이십니다. 이에 대해 약간의 의문이라도 있었던 분은 이 소책자를 통해 마음의 평안을 얻으시고 좋으신 하나님을 잘 알고 믿고 끝까지 섬기게 되기를 바랍니다. 다 읽으신 후 주위의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시면 그 분에게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2016년 10월

김상복 목사


서 문


회의적인 시각을 갖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렇게 회의를 품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굳건한 신앙을 가지려면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지도 모릅니다. 질문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종국에는 그렇게 부주의했음에 대해 자신을 책망하기 쉽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의문이 생기는 것도 잘못이 아닙니다. 그 누구도 맹목적인 신앙으로 성경을 받아들여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성경이 정직한 질문에 맞대응 할 수 없다면 성경은 우리의 믿음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사 1:18)라고 말씀하시며 성경이 진실로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말씀인지 아닌지 결정하기 위해 우리의 이성과 감정을 동원하라고 초청했습니다.이 초청을 받아들여 우리는 구약의 하나님께로 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과 관련이 있다고 알게 된 폭력이나 분노, 기만에 신경이 쓰인다는 것을 인정해도 됩니다. 신약과 구약의 차이점을 모르는 것처럼 가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에게 선하게 대하라고 말씀했지만 구약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전혀 다른 모습인 것처럼 보입니다.그러한 차이점이 사실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우리는 여러분이 이 소책자를 읽음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질문들에 답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허버트 밴더 러트

RBC 원로 편집인


사려 깊은 사람들이 이런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까요?


성경을 읽는 현대인들은 구약 성격에 나오는 종교전쟁을 이해하기 힘든 문제로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전쟁에 관한 국제법에 의하면 민간인, 그리고 교전 중인 부대의 비전투 요원은 보호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1949년에 제정된 제네바 협정의 공통3조는 “적대행위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 즉 무장군인이었으나 무기를 내려놓은 군인, 병이나 부상, 혹은 구금이나 다른 어떤 이유로, 전투지역 밖에 있었던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인도적인 대우를 받아야한다.”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의 하나님의 삶은 인간의 존엄에 대한 상식적인 기준에 미달하는 것같이 보입니다. 적군뿐만 아니라 여자, 어린이, 동물까지 말살하라고 명령하신 이 하나님은 전쟁의 가장 기본적인 규칙도 지키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국제 규약은 민간인들에 대한 전쟁 범죄를 처벌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삼상 15:2-3)


질문 1: 만약 구약의 하나님이 선하다면 어떻게 여자와 아이들과 동물까지 진멸하라고 명령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젖먹이와 민간인을 도살한 하나님이 나중에 자신을 쫓는 사람들에게 한 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 뺨을 돌려대고, 원수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그들을 악의적으로 이용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촉구한 주님과 같을 수가 있을까요?
이런 사실들이 곤혹스러움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윤리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이 질문들에 성경이 어떻게 답하는지 보겠습니다.


중독성 문화

팔레스타인, 레바논, 시리아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유물들은 성경에서 묘사하고 있는 고대 중동 사회의 모습을 확인시켜 줍니다. 그 땅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들은 인간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의식으로 인해 남녀의 매춘이 제도화되었습니다. 신들을 기쁘게 한다며 어린이를 제물로 바쳤으며 그 신들 중 우두머리는 보통 바알로 알려진 태양신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과 그 과정에서 일어난 기적들을 통하여, 그 분의 존재를 알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맹목적인 우상 숭배 상태가 여러 세기에 걸쳐 끈질기게 계속되었습니다. 여리고에 살았던 기생 라합은 그의 동족들이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다고 확인했습니다.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2:9-11).

가나안 사람들은 자비를 받을 기회를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며 자신의 백성을 위해 기적을 행하였던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을 창조주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정복의 조건

구약의 기록들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팔레스타인의 모든 주민들을 죽이라고 이스라엘에게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만약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으면 친히 가나안 사람들이 서서히 그 땅을 떠날 명분을 주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내가 내 위엄을 네 앞서 보내어 네가 이를 곳의 모든 백성을 물리치고 네 모든 원수들이 네게 등을 돌려 도망하게 할 것이며 내가 왕벌을 네 앞에 보내리니 그 벌이 히위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을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 그러나 그 땅이 황폐하게 됨으로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희를 해할까 하여 일 년 안에는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고 네가 번성하여 그 땅을 기업으로 얻을 때까지 내가 그들을 네 앞에서 조금씩 쫓아내리라(23:27-30).

우리가 위에서 인용한 라합의 말에서 이미 보았던 것처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정복 작전을 개시할 때 하나님은 가나인 사람들에게 달아날 명분과 기회를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온다는 것을 그들이 확실히 듣게 했고 그들이 공포에 질리게 했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이 땅을 더럽혔기에 그 땅에서 살 권리를 몰수당했지만 구약의 하나님은 그들에게 후퇴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에게 저항하는 길을 선택을 했을 때에 가서야 비로소 하나님은 그 지역을 전부 진멸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새로운 사회

만약 가나안 사회가 건드림을 받지 않고 존속했다면 그들의 우상숭배 문화가 계속 영향을 미쳐서 심지어는 그 지역의 모습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구약의 하나님은 새로운 사회 질서의 가치를 펼치기 위해 고대 세계의 교차로였던 가나안 사람들의 고향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이 400년 전에 그 땅을 약속했던 이들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본보기를 보이며 주변 나라들에게 “빛”이 될 것이었습니다(출 34:10-17; 신 7:1-11; 20:16-18). 세계 역사상 그 어떤 나라도 그 땅과 거민과 그들의 하나님이 이 지구의 모든 나라에게 축복의 근원이 된 적이 없습니다.

충격적 가치

하나님께 저항했던 공동체 사회들을 진멸하는 일은 이스라엘에게 우상숭배의 결말, 특히 우상숭배가 하나님에 관한 진실에 저항했을 때의 소름끼치는 실상을 깨닫게 했을 것입니다. 집행자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건전한 두려움과, 거짓 종교에 대한 증오가 형성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설령 하나님의 백성 일지라도 그런 심판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가족이어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 신들 중의 신인 하나님을 아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유익이 되는지, 그리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때의 무시무시한 결과가 어떤지 보여주기 위해 선택된 것입니다.

시간과 영원에 대한 관점

우리는 그 시대와 3000년을 떨어져 있기 때문에 겁에 질린 채 무기력한 토지소유자의 아내들과 자녀들을 처형했던 유대 병사들을 생각하면 우리는 괴롭고, 불쾌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시간과 영원이란 불가피한 상황은 그것만의 관점이 있습니다. 만약 가나안 문화의 생명 없는 우상들이 살아있는 하나님과 전쟁을 했다면, 만약 그들이 선함과 생명의 지식을 지닌 사회를 빼앗고 있었다면 저항자들의 죽음은 메시지를 전했을 것입니다. 그런 메시지가 없었다면 가나안 문화는 마치 진단 못한 암처럼 아프리카와 아시아, 유럽의 세 대륙을 연결하는 중요한 육교인 가나안과 접촉한 모든 사람들을 감염시켰을 것입니다.

사람의 이른 죽음은 영원이란 창을 통해서 보면 다르게 보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습니다. 어떤 이는 고통 없이 갑자기 죽고, 어떤 이는 서서히 심한 고통을 겪으며 죽습니다. 어떤 이는 젊어서 죽고 어떤 이는 노령에 죽습니다. 만약 영원에 대한 성경의 시각이 옳다면 가나안 어린이의 죽음이 가나안 문화의 우상으로 점철되어 누린 장수보다 낫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찍 세상을 떠나는 것은 그들이 언제가 임할 심판의 날에 죄 짐이 더해지는 것을 막아줍니다(롬 2:5).
왜 하나님이 저항을 선택한 가나안 사람들의 죽음을 필요로 했는지 알고 나서도 우리는 하나님이 했던 일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해가 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다한 인정이 아닙니다. 우리가 삶 전체를 그분이 보는 것처럼 보지 못한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믿어야 하는 이유들

비록 하나님이 우리가 인정할 것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합니다. 성경을 읽은 정직한 독자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신뢰성에 대한 굉장히 많은 증거들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그 분이 하신 약속을 지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찾는 자에게 자신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종국에는 인간들이 대대로 저질러온 잘못을 바로 잡을 것이며, 그분의 원수들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다는 것을 믿을 근거를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그분의 무한한 은혜와 완벽한 정의는 승리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는 권리를 수용하기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그 분의 권위를 받아들이기를 요구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고 유지하는 그 분은 이렇게 선포할 권리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33:19).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바로 왕에게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출 9:16)라고 말하신 것은 그 분의 신성한 권리입니다. 하나님이 만주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가혹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해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이 선택하신 길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롭고 공정한 경고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사랑 안에서, 모든 세대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궁극적인 책임에 대해서 경고하기 위해 고안된 한 본보기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 일을 했던 이유와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지닌 하나님 될 권리를 확인할 많은 이유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좋은 질문

그렇다면 신약의 하나님도 이 점에서 마찬가지일까요? 예수님은 더 온화하고 더 친절한 하나님을 보여주시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진실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인간들을 대하면서 항상 분명히 보여주신 사랑과 관대함에 대한 분명한 그림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막 11:28-30)라고 말했습니다. 그 분이 하신 이 말씀은 구약의 하나님이 하신 간곡한 초대를 반복한 것입니다.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33:11)

그러나 하나님의 인내심이 정해진 길로 갈 때, 그리고 세상이 저항하여 하나님의 사랑에 복종하는 삶에서 벗어나 살기로 결정했을 때 성경의 마지막 책에서 구약의 하나님의 심판이 다시 한 번 나타납니다. 지구 인구의 삼분의 이 이상을 죽이는 종말의 무서운 심판의 장면이 벌어집니다.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하더라”(6:14-17)

하나님은 전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항상 무한한 사랑과 무서운 진노를 모두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질문 2: 전지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구약의 하나님처럼 자신이 하신 일에 대해 후회나 슬픔을 드러낼 수 있을까요?


이것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항상 완벽하게 통제하신다면, 그리고 하나님이 모든 일을 예견하신다면 왜 나중에 후회하거나(삼상 15:35) 한탄했을까요?”(창 6:6)

단어들의 의미

성경에서 단어들을 사용하는 방식이 이 질문에 대한 부분적 답변입니다. 이 성경 구절들에서 사용되는 “한탄” 혹은 “후회”라고 번역되는 히브리어는 “잘못한 일에 대한 후회”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히브리 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108번 사용되었습니다. 킹 제임스 영어성경(흠정역)에서는 이 단어를 “회개”라고 41번, “위로”라고 57번, “위로를 받다”라고 9번, “안락”으로 한번 번역되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니 질문이 떠오릅니다. 어떻게 같은 단어를 한 책에서는 “위로”로 번역하고 다른 책에서는 “회개”로 번역할까요? 그 답은 히브리어 단어가 가끔씩 영어와 비슷하게 구사된다는데 있습니다. 문맥에 따라서 같은 단어가 다른 뜻으로 사용될 수가 있습니다. “sharp”한 (선명한) 사진과 “sharp”한 (예리한) 칼에서 보듯이 “sharp”라는 단어는 다른 의미로 쓰입니다. 우리는 자세히 살펴보아야만 문법적 연결고리를 볼 수가 있습니다.“회개” 혹은 “위로”의 경우, 공통의 요소는 “감정의 변화”입니다. 친구의 말없는 포옹으로 슬픈 감정이 진정되거나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화목한 관계로 창조했던 사람들이 심판 때 그 분의 분노를 쏟아 붓게끔 자신에게 반역하는 것을 보시면 이러한 감정의 변화가 정반대로 일어납니다.여기에서 나타나는 점은 하나님이 죄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선의로 실수를 했다는 말씀조차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고통스런 감정을 느끼게 하는 어떤 일을 할 필요가 있음을 알아냈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참 마음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영원하고 전지하신 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분이 영원 전에 미리 보신 것이 실제로 다가왔을 때 우리와 감정적으로 엮여 있는 분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 철학에서 말하는 감정적으로 분리된 신들과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깊이 사랑하셔서 우리의 슬픔과 기쁨, 고통과 즐거움, 실패와 성공을 우리와 공유합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능력으로 그가 지으신 피조물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인격적인 분입니다. 어떤 것도 그 분의 통제 밖으로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반면, 우리에게 도덕적, 영적 선택권을 줍니다. 우리가 순종을 선택할 때 그는 기뻐하고 우리가 불순종의 길을 선택할 때 그는 슬퍼합니다. 이스라엘이 그의 죄 때문에 고통 받았던 일을 상기하며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63:9-10).

호세아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서 주님은 반역하는 이스라엘을 앗시리아에 정복당하도록 할 생각을 하며 자신의 괴로운 마음을 드러내셨습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11:8).

하나님이 후회하시는 것은 그가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너무 선하셔서 우리의 불순종을 못 본척하지 않고,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의 곤경에 무관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대사람들에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심판에 대해 경고하라고 에스겔에게 하나님은 말씀했습니다.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33:11).

이러한 구절들에서 하나님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견할 수 있지만 그 분은 여전히 우리의 고통과 실망을 느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천사들과 사람들이 일으킬 반역을 미리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도망간 인간종족이 무슨 일을 하려하는지, 얼마만큼이나 우리의 반역을 두고 볼지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경건하기보다는 점점 더 악해지자 그 분이 보신 상황에 대해 감정적으로 응답하신 것으로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6:5-7).

앞으로 올 세대들을 위하여, 그리고 세상에 만연한 폭력 때문에 하나님은 노아의 세대를 심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위의 성경 구절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했던 종족을 멸망시킴으로써 그의 마음과 감정을 바꾸며 슬퍼하시는 생생한 이미지에 기대어 창세기 저자인 모세가 하나님의 내키지 않는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사울 왕이 실패를 거듭하며 그가 권력을 유지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입증되었을 때 하나님은 괴로워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왕의 자리에 그를 선택했던 것을 후회하면서 사울에게 그의 지위를 내어놓게 하는 일의 혐오스러움을 표현했습니다(삼상 15:11). 하나님은 실수를 용납하지 않으시지만 자신이 이스라엘 왕으로 만들었던 사람을 심판해야 하면서 슬픔을 느꼈습니다.하나님은 아무런 슬픔이나 거리낌 없이 노아의 세대에 파괴적인 홍수를 보낸 것이 아니고, 사울을 왕좌에서 내려오게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같은 감정을 가지고 계신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온전함이 그분으로 하여금 불순종이나 반역을 심판할 필요가 있게 만듭니다.하나님의 실제로 지니신 감정은 그 분이 우리의 삶에 진정으로 개입하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실시간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갖는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 때문에 그 분의 마음의 변화는 우리가 보통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회개나 후회 같은 것으로 제한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23:19).


질문 3: 만약 구약의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애초에 그분은 왜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도록 허락했습니까?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인간에게 악을 선택할 기회를 준 것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믿어야 할 이유가 틀림없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전혀 선택권을 주지 않는 것보다 선과 악 사이에서 우리가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 성경의 주님에게 더 좋았을 것임을 우리는 믿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선을 위하여 악을 허용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 교실 안에서는 흥미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 혹독한 고통을 받도록 하는 이유를 병실에서 생각하기란 우리의 믿음에 대한 어려운 시험이 될 수가 있습니다. 가슴이 찢어지는 아기 어머니는 “내가 고도장애를 가진 아기를 낳은 것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나를 위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헌신적이고 사랑이 많은 딸이 알츠하이머 치매를 앓는 어머니의 생명 연장에 대해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나아질 희망이 보이지 않는 끔찍하게 가난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왜 하나님이 인간의 궁핍함이 하나님을 영예롭게 하거나 인간의 궁극적인 선을 고양시킨다고 생각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대안

이 질문들은 어려운 질문입니다. 아마도 이 질문들에 대한 최선의 대답 방법은 “누구도 지금껏 도덕적 혹은 윤리적 결정을 해본 적이 없는 세상”이라는 대안을 상정해 보는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아마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에는 무엇인가 빠진 것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일에는 무엇인가 빠진 것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무엇인가 빠진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이 빠졌는지 알지도 못할 것입니다. 명예, 용기, 신실, 희망, 사랑, 성격 같은 단어들은 지금 우리가 아는 의미와 같지 않을 것입니다.
선택의 심오한 가치는 쉽게 파악이 안 됩니다. 그러나 선과 악 사이에서 선택하는 능력은 삶을 위한 헤아릴 수 없는 열정과 개성의 원천입니다.


진정한 선택이 있는 곳에서 개성은 성장하며 관계는 깊어집니다.

창세기의 첫 세 장의 사건들을 다시금 생각해봅시다. 우리의 첫 조상이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의심할 것도 없이 우리는 모두 엄청난 고통과 슬픔을 견디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떻게든 아담과 이브의 옳은 선택의 결과를 나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에 대해 추측하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실상은 사랑과 지혜의 하나님이 우리의 첫 조상에게 그들이 잘못할 것을 알면서도 “도덕적 선택권”을 주셨고 그들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하나님은 그분의 이름에 가장 위대한 영광을 부여할 수 있었고 우리에게는 가장 위대한 선을 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선택할 자유

한 걸음 물러서서 더 큰 그림을 봅시다. 구약의 관점에서 보면 사탄은 이브에게 금지된 과일을 먹으면 그와 아담이 “하나님처럼 선악을 알게 된다.”(창3:5)라고 심각한 반쪽 진리를 이야기 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선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악을 “안다”는 것일까요?
우리는 하나님이 “악을 알았다.”라는 것은 하나님이 어느 천사가 역사 이전에 지은 죄와(이사야 14:12-15 그리고 에스겔 28:11-17에서 암시) 인간의 죄를 미리 보셨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려야만 합니다. 이러한 예지는 하나님에게 선과 악의 차이에 대한 경험적인 지식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결코 죄를 지으신 적이 없지만 그는 죄의 뒤를 따르는 결과를 영원 속에서 보셨고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사랑하는 피조물들이 반역과 죄의 길을 선택할 것이기에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분노와 실망과 슬픔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사탄이 이브에게 말하지 않았던 것은 선과 악에 대한 인간의 지식이 하나님의 지식과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탄은 우리의 처음 조상에게 지혜가 담긴 하나님의 지식의 무게가 어리석은 “지식”의 짐을 지고 있는 자녀들을 엄청나게 누를 것임을 경고하지 않았습니다.하나님이 그런 위험부담을 허락하는 것이 도덕적일까요? 만약 우리의 첫 조상들이 더 잘 알았더라면 절대로 저지르지 않았을 일에 대해 무지하도록 하나님이 내버려 둔 것이 옳은 일입니까? 우리가 확실하게 아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택할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그러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신묘함을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의 어리석음 이용하였습니다.


은혜의 섭리

하나님은 값이 따질 수 없는 은혜와 자비라는 자신의 속성을 보여주시려고 우리의 상실을 이용했습니다. 하나님이 죄악 없는 세상에서 자신의 친절과 사랑을 보여 주시리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지만 우리가 사는 이 타락한 세상에서 보여줄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와 궁핍에 깊이 빠졌을 때만 보이는 어떤 것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가 도덕적으로 불순종을 기회로 이용했습니다. 우리자신의 죄 때문에 우리가 정죄를 받았다는 것을 아는 우리보다 누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긍휼하심의 정도를 잘 알아보겠습니까?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자원하여 달리시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희망이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보다 누가 더 하나님의 자기희생의 가치를 매길 수 있겠습니까?
만약 구약의 하나님이 신약의 하나님과 보조를 맞추지 않았다면 신약을 기록한 사람들은 이 세상 속으로 그런 악이 들어오는 것을 허락한 하나님께 분명히 이의를 제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의 복음서들과 서신서들은 모세의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신약에서는 어떻게 하나님이 끔찍한 것조차 취하여 선한 것으로 변화시켰는지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5:1-5)

여기 이 한 구절에서 바울은 직물과도 같은 우리의 삶 속에 타락한 세상의 고통들을 짜 넣는 하나님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토록 부요하게 만들 도덕적 영적 자질을 쌓아주기 위해서 고통과 슬픔을 사용합니다. 그러면서 시종일관 우리의 슬픔과 불행을 함께 나눕니다.


질문 4: 조급한 성격을 가진 구약의 원시적 하나님과 신약의 가르침은 일관성이 없지 않습니까?


한 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간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의 생명의 심지를 잘라버렸습니다. 그 분은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하나님답지 않다고 여길 일을 했던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서의 허망한 죽음

아간은 약속의 땅에 들어간 직후에 신속한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습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헤맨 후 하나님의 백성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도착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긴 행로에서 처음으로 맞닥뜨린 성벽에 둘러싸인 도시 여리고를 극적으로 정복했던 바로 그때 아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습니다. 그는 여리고성에서 약탈을 했고 사유를 금지했던 값비싼 물건들을 그의 장막에 숨겼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간에게 크게 진노하여 이웃의 작은 도시를 공격할 때 36명의 이스라엘 군병들이 전사하도록 내버려 두었다고 구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 뒤 하나님은 아간의 죄를 알리고 그의 온 가족과 가축들을 돌로 치라고 명령했습니다(여호수아 7장).이로 인해 아마도 현 시대의 독자들은 신약의 사랑의 하나님의 위엄의 기저에 있는 일종의 공포 유발형 하나님을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너무 급하게 결론으로 건너뛰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간의 가족의 죽음과 같은 사건이 초대 교회 시절의 삶에서 뚜렷하게 반복되는 것을 만약 여러분이 생각해 본다면 말입니다.


교회에서의 허망한 죽음

사도행전 2장에는 오순절에 일어난 교회의 탄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 직후에 우리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이름을 가진 남편과 아내에게 일어난 비극적인 결말을 읽습니다. 교회에 말하지 않고 숨긴 돈에 대해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두 사람을 죽게 했습니다. 그 결과로 방금 새로 생긴 교회 안에 굉장한 두려움이 퍼졌습니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5:1-5).

이 이야기의 나머지는 이렇습니다. 3 시간 후 아나니아의 아내 삽비라가 집으로 오자 베드로가 같은 질문을 했고 아내는 남편이 그랬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도 곧바로 넘어져 죽었습니다. 결과는 남편이 죽었을 때와 같았습니다.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5:11).

이들 두 이야기에 대해 우리가 모르는 것이 많지만 초대 교회 시절 신약의 하나님은 약속의 땅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할 때 그분이 했던 일을 그대로 했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두 경우 모두 하나님은 사랑받을 자격이 있을 뿐만 아니라 두려워할 존재이기도 함을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을 기만한 사람들로 본보기를 만들었습니다.
일관성에 대한 분명한 증거는 어쨌든 신약의 마지막 책에서 발견됩니다. 구약의 하나님이 원시적이며, 분노하며, 폭력적이라고 믿고 신약의 하나님은 성숙된 사랑과 인내심이 많은 분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성경이 어떻게 끝을 맺는지 읽어보아야만 합니다.구약의 그 어느 책도 이스라엘과 열방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날 심판을 묘사하는 이 책 요한계시록 보다 분노와 폭력이 더 많이 실린 책은 없습니다. 아래에 발췌한 구절은 심판의 약속으로 몸서리처지는 이 책의 단지 몇 줄에 지나지 않습니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6:15-17).

우리는 구약의 하나님을 논쟁거리로 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분이 너무 화를 많이 내고 너무 폭력적이며 너무 요구하는 것이 많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교회의 하나님과 성품이 다르다고 합리적으로 주장을 할 수가 없습니다.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에서 모두 하나님은 자신이 마땅히 사랑과 믿음과 두려움의 대상이 될 자격이 있는 하나님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순간들을 선택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신약의 인격화된 그리스도와 성품이 같은 차원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음 구절이 바로 예수님이 선포한 신약과 구약의 하나님의 관계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5:17)


질문 5: 하나님이 아간과 아나니아의 거짓말을 심판했는데 어째서 이스라엘의 선지자이며 제사장이었던 사무엘이 진실을 말하지 않도록 격려를 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의 배경은 사무엘상 16:2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선지자 사무엘이 사울에게 제사지내러 왔노라고 호도성 답변을 하게함으로써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차기 왕이 될 다윗에게 기름 부으러 베들레헴에 간 것을 사울이 알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호도하게끔 하나님이 시키신 것과 하나님은 거짓말을 싫어하시며 그분 자신은 죄가 없다고 한 구절이 어떻게 앞뒤가 맞다고 할 수 있습니까? 누구에겐가 거짓말을 하게 하는 것은 당신 자신이 거짓말하는 것만큼 나쁘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누구에겐가 거짓말을 하게 하는 것은 당신 자신이 거짓말하는 것만큼 나쁜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비난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실제로 사무엘에게 정말로 거짓말을 하라고 말씀했는지 보기로 합시다.


거짓말의 정의

십계명의 제 9계명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출 20:16)입니다. 이 율법은 다른 사람이 부당하게 해를 입게끔 보고를 허위로 조작하거나 허위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꼭 집어서 금지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다른 구절에서는 허위로 거래하거나 진리를 부정한다는 의미로 거짓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백성이 그들의 정직성으로 구분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사실을 숨기라고 절대로 말할 리가 없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상황판단이 빠른 사람이 되는 것이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이다”(삼하 22:27)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베들레헴에 가는 진짜 이유를 사울에게 숨기라고 하면서 부정직한 왕을 대할 때 상황판단이 빨라야함을 가르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거짓말을 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사무엘에게 진실의 반만 말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진실을 부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악한 사람을 속이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진실을 숨기는 것이나 영리하게 원수로 하여금 스스로 잘못된 결론을 내리도록 만드는 것을 구태여 거짓말이라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무엘은 주님께 이스라엘의 다음 왕에게 기름을 붓기 위해 베들레헴에 가는 것이 불안하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어쨌든 사울은 여전히 자신의 가문이 아닌 외부의 누구인가가 이미 후계자로 선택이 되었다는 사실을 들었다면 굉장히 분노했을 것입니다. 그는 어쩌면 선지자 제사장을 처형했을 지도 모릅니다.


사무엘의 불안한 처지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비록 거짓말하는 것은 나쁘다 하더라도 원수가 잘못된 결론을 내리도록 하는 것은 잘못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이 처한 곤경을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암송아지 한 마리를 가지고 가서 사람들에게 공식적인 희생제사 의식을 준비할 것을 지시하라고 했습니다. 그런 제사는 일반적으로 축제의 서막이었습니다. 축제가 준비되는 동안 틈새 시간에 사무엘은 이새의 가족을 만나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에게 가름부음은 그저 다윗이 하나님의 특별한 종이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차기 왕이 되리라는 암시를 구태여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시점에서 이 사실은 아마도 다윗에게조차도 알려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무엘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은 실제로 그 지역 사회를 위해 희생 제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사무엘이 의도적으로 모든 진실을 사울에게 숨기려 했을까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의 다음 왕이 될 다윗에게 기름을 붓기 위해 왔다는 것을 누구에게도 말할 의무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속여야할 권리를 가져야만 할 상황이 있습니다. 외출하면서 집에 불을 켜놓아서 도둑이 당신이 집에 있다고 생각하도록 한 적이 있습니까? 또는 ‘개조심’이라는 표지판을 사용하여 당신의 집에 침입자가 못 들어오게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누구든 당신의 집 마당에 접근할 때 개는 사납게 짖을 수도 있고 상냥한 말 한 마디에 약하게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표지판은 침입자는 맹견에게 공격을 받는다는 잘못된 인상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개를 기르고 있다면 표지판으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잠재적인 무단 출입자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당신 집에 경보 장치가 없는데도 전면의 창에 경보장치에 의해 당신의 집이 보호를 받고 있다고 표지를 붙여놓으려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 될 것입니다.이유가 있는 속임수가 아니라 거짓말이 되려면 우리가 한 진술이 허위사실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고, 우리가 했던 약속을 위반하고 있고, 우리가 지닌 의무로부터 도피하도록 도와야만 합니다.따라서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거짓말을 하라고 지시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그가 방문하는 실제 목적을 그것을 알아야할 특별한 권리가 없는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않고 선포하라고 말했습니다.


질문 6: 왜 구약의 하나님은 어떤 제사 율법 위반들을 심각한 도덕적인 실패보다 더 가혹하게 처벌하는 것처럼 보일까요?


이 질문을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사람들이 심각한 도덕적인 죄를 지었을 때보다 안식일의 규칙이나 제례 의식의 금기를 깨트렸을 때 더 노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 하나님은 롯이 딸과 합방하는 것을 허락했으며(창 19:30-38) 다윗이 불륜을 저지르고 살인을 하려했는데도 계속 왕위에 두었으며(삼하 11) 안식일에 땔감을 모은 사람을 즉시 돌로 치라고 명령했으며(민 15:32-36) 수레에 실려 옮겨지는 법궤에 손을 댄 웃사는 그 자리에서 죽었을까요?(삼하 6:1-10).
이들 질문만큼 어려워 보이는 것이 이들 질문에 대해 답하기 입이다. 이 문제들에 관한 답을 몇 가지 생각해봅시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내리신 일련의 심판의 “불균형성”에 관한 대답 중 하나로서 우리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즉각적인 대응을 그 죄가 하나님을 얼마나 불쾌하게 했는지를 나타내 주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혹은, 하나님의 즉각적인 대응을 하나님이 나중에 하실 일을 나타내 주는 것으로 생각하는 실수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전도서의 저자는 이렇게 평했습니다.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8:11).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은 죄의 결말을 내리기를 미룬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제사의식 중의 생긴 일처럼 놓칠 수 있는 중요한 점을 지적하기 위하여 곧장 순간적으로 심판을 내립니다.

보이지 않는 죄의 결말들

밧세바와 간음한 후에도 다윗의 일상은 겉으로는 전과 같은 모습을 계속 보였습니다. 그가 했던 일을 알았던 몇 사람은 하나님이 그가 저지른 죄에 관해 아무런 제제를 하지 않으실 모양이라고 추정했습니다. 그러나 시편 32편은 다윗이 극심한 정신적 고통의 기간을 지나온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사무엘 하 12장은 그가 했던 회개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시편 32편과 51편은 그를 용서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이 구절들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알지 못했을 마음속 혼란 상태를 다윗은 수개월 동안 거쳤습니다. 더 나아가서, 대충 대충 지나가는 사람은 그 일 이후 다윗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무엘하 13-18장을 꼼꼼하게 읽은 사람은 증오, 음모, 음란죄, 살인과 반역 등 이후 다윗의 생애에 일어난 일들을 통해서 다윗이 죄에 대한 벌을 모면하지 못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지연되는 반응

시편 73편 기자는 그가 보기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자신들만 의지하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에 회의에 빠졌습니다.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이 자주자주 그들의 삶이 끝날 때까지 번영하는 사실에 그는 심란해졌습니다.
시편 기자의 분노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묵상 중에 그가 부러워해왔던 사람들의 최후의 순간을 잠간 보았을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73:16-26).

하나님은 사람이 죄를 짓는 바로 그 순간에 그를 쳐서 죽임으로써 그것을 목격한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그들이 보도록 도와줍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사람에 관한 한 사후에 받는 벌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완전한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영원토록 기다리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

때때로 구약의 하나님은 인내심을 가지고 그분의 백성들의 고질적인 행동들을 끈질기게 참으면서 생각을 바꿀 기회를 셀 수도 없이 많이 줍니다. 그러나 여리고에서 약탈물을 가져갔던 아간의 경우나, 하나님이 모세에게 옮기지 말라는 특별한 지시를 내렸던 그 법궤를 잡으려고 손을 뻗은 일로 죽음을 맞았던 웃사의 경우처럼 하나님은 속히 행동하기도 합니다(민 4:1-20).
이 두 경우 모두,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빚진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조건에 의거하여 지속적으로 그 분의 자비를 베풀 권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라고 말씀했습니다(롬 9:15).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참을성을 가지고 자비를 보여줄 권리가 항상 있습니다. 그 분은 자비를 계속 베풀 것인지 혹은 즉각적으로 정의를 시행할 것인지 선택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원이라는 관점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는 이러한 죽음들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볼 수 있다면 그런 죽음들이 우리에게 문젯거리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위에서 언급한 두 사람이 만약 진정한 구약의 신앙인들이었다면 그들은 지금 지금 천국에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몇 살에 어떻게 죽었는지 지금은 그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만약 그들이 신앙인들이 아니었다면 그 때 맞이했던 죽음이 그들이 심판받을 때 죄 짐의 무게가 추가되는 것을 막아주었을 것입니다(롬 2:5-6).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영원한 운명을 좀 더 견딜 만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하면서 이점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영원이라는 관점에서는 사람이 죽음을 맞는 때나 방식은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에서 보는 것과 아주 다르게 보일 수가 있습니다.


질문 7: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부모의 죄로 인하여 자녀들이 처벌받으면 안 된다는 그 분 자신의 원칙을 때때로 위반하지 않았습니까?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사무엘하 21:1-14절을 보면 다윗이 하나님께 왜 3년 동안 비를 내리지 않으셨냐고 묻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은 사울 왕이 이스라엘과 기브온 사람들과 맺은 조약을 파기했기에 그 땅에 내린 벌이라고 다윗에게 말했습니다(수 9장). 하나님은 다윗이 기브온 사람들이 청원했던 응징을 허락하여 보상해주기를 원했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다윗에게 사울의 두 아들과 손자 다섯을 처형하겠다고 했고 다윗으로부터 답을 받았습니다. 사울의 아들들과 손자들이 처형된 후에야 하나님은 필요했던 비를 내리셨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부모의 죄 때문에 자녀들의 죽음을 허락했는지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나라의 잘못을 바로잡기

사울 왕이 통치했던 어떤 시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당한 이유가 없었던 것으로 드러난 공격을 해서 수많은 기브온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럼으로써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있었을 때 이스라엘과 기브온이 맺었던 언약을 위반했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에게 저질렀던 잘못을 다윗이 바로잡지 않았고 이에 기브온 사람들은 다윗이 이 문제에 대해 태만함을 을 확실히 느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스라엘의 부당 행위에 대한 보상을 받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제의는 괜찮은 것이었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금전적인 합의를 요청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방인이었고 사울의 가족에 대한 보복, 즉 사울의 자손 일곱을 처형하는 것을 원했습니다. 그 당시의 문화를 고려해볼 때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다윗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는 그들의 최후통첩을 존중해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이들 일곱 사람은 조상이 지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보상의 일환으로 벌을 받은 것입니다.
처형당한 사울의 자손들은 실질적으로는 전사자입니다. 그들은 부모들의 잘못으로 인한 짐뿐만 아니라 이방사회기 열망한 복수의 짐까지 졌던 것입니다.배상이라는 명목으로 이러한 부당함을 하나님이 받아들인 것은 수용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는 것은 비록 사울의 후손들에게는 이 일이 공정하지 못했지만 이 배상제의가 정당하다는 것입니다.하나님은 자녀들이 부모의 죄를 책임지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기브온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심판의 날에 이들 자녀들이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서만 책임질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사울이 자신의 죄를 감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들이 부모의 잘못으로 인해 짐을 지는 경우는 너무 자주 일어납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에서는 모든 세대의 모든 잘못이 바로 잡힐 것입니다.


하나님의 최후 심판에서만 자식이 부모의 죄를 책임지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명성을 지키기 위해

더 큰 그림으로 보면, 주님은 기근을 이용하여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성을 지키게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기브온 사람들에게 그들을 한 사람도 죽이지 않겠다고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을 걸고 맹세를 했었습니다(수 9:18).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맺었던 성스러운 조약을 훼손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이방 세계 앞에서 여호와의 거룩한 이름을 모독했습니다. 그 문제는 결코 묵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울 통치하에서 이스라엘이 기브온 사람들에게 저질렀던 일은 그 분이 허락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를 원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하나님은 기근을 보내고 다윗으로 하여금 기브온 사람들이 보상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지지 묻어보도록 이끌었습니다.
이것이 좋은 결말을 만들기 위해 하나님이 좋아하지 않는 어떤 일을 허락하신 여러 사례들 중 하나입니다. 자신들과 전혀 상관없는 일로 처형당했던 사울의 아들과 손자들을 보시고 하나님이 슬퍼했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질문 8: 어떤 사람들을 증오하는 것을 허락한 구약의 하나님이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친 신약의 하나님과 하나 되며 같은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은 부분적으로는 한 형제는 사랑하고 다른 형제는 미워한다는 아래의 하나님의 말씀에 나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1:2-3)

이 분명한 문제의 답은 영어성경에서 “미워했다(hated)”로 번역한 단어의 히브리 문화적인 뜻을 중심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오늘 날 우리는 누구를 미워한다고 말하면서 심한 반감과 악감정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서시대에는 “미워하다”라는 단어의 의미가 그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구약의 미워하다의 의미

구약시대에 미움을 받는다는 것은 당신보다 다른 사람이 더 사랑을 받는다는 뜻이거나 혹은 당신을 제치고 다른 사람이 어떤 특별한 역할에 선택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킹 제임스 영어 성경(흠정역)의 창세기 29장 31절, 33절에 나오는 “미움 받았다(was hated)”는 야곱의 첫 아내 레아가 그녀의 동생 라헬보다 사랑을 덜 받았다는 사실을 기술한 것입니다. 창세기 29장 30절은 “야곱이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고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레아와 라헬을 둘 다 사랑했는데 라헬을 더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레아에 대한 야곱의 태도는 반감이 아닙니다. 실제로 야곱은 자신이 죽을 때가 가까웠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자신을 가족묘지에 장사지내라고 부탁하면서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창 49:31)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비록 라헬을 각별히 사랑했지만 레아를 존중한 것은 분명합니다. 특별히 명예롭게 선택되었다는 것은 사랑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덜 중요하거나 덜 명예로운 자리가 주어졌다는 것은 그곳이 아무리 가치 있는 자리라 할지라도 원뜻과는 달리 미움을 받았다고 번역이 된 것입니다.

신약에서 확인한 사례

신약은 이러한 “미워하다”의 의미가 유대역사 전반에서 쓰임을 확인해줍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14:26)

분명히 예수님은 우리에게 친척을 싫어하거나 그들에게 악감정을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으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3:34)

그러므로 우리의 가족과 친구를 미워하라는 위의 말씀은 우리의 사랑과 충성을 최우선 적으로 예수님께 드리라는 명령임이 명백합니다. 그러다보니 우리가 모든 다른 경쟁자들을 예수님에 비해 무시한다는 느낌을 갖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에서와 야곱을 모두 사랑했지만 야곱을 선택하여 그에게 선택된 사람이라는 지위를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은 특별한 특권을 야곱에게 주셨고 그리고 책임이라는 짐도 더 주셨습니다.


질문 9: 왜 구약의 하나님은 여자보다 남자을 선호함을 보여줍니까?


구약을 보면 여자에게 남자와 동등한 사회적 지위를 주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남자는 아내와 이혼할 수 있었지만 여자는 남편과 이혼할 수 없었습니다. 장막이나 텐트에서 예배를 볼 때 여자들에게는 별도의 자리가 주어졌습니다. 제례에 관한 율법에서도 여자들은 매달 그리고 출산 후에 정결 의식을 치러야 했습니다. 더 나아가 여자가 딸을 낳으면 아들을 낳을 때보다 제례적으로 부정한 기간이 두 배로 길었습니다.
창세기에서 완곡한 표현으로 하나님이 아담의 갈비뼈를 취해 아담을 “돕는 이”로 여자를 창조했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이 “돕는 이”라는 단어는 명예로운 단어로서 바로 하나님 자신에게 사용되는 것입니다. 특별한 예외가 있기도 하고, 드보라, 에스더, 잠언 31장에 나오는 현숙한 여인으로 묘사되는 사람들이 있지만, 유대사회에서 여자들은 동등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습니다.일부다처제 같은 여성들이 지는 부담은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여 하나님께 용인을 받은 사회적 양해사항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여성들은 다른 문화권의 여성들보다는 그래도 형편이 더 나은 편입니다. 한 학자의 주석에 의하면 “히브리의 사회제도에서는 여성의 지위가 주변 이방국가들의 여성의 지위와는 크게 다릅니다. 여성의 자유가 더 많고, 여성의 일자리가 더 다양하고 더 중요하며, 사회적 지위도 더 우세하며 더 존경을 받습니다.”(국제표준성경백과사전 제5권, 3,100쪽).
체력이 기술로 상쇄되는 우리 시대의 눈으로 우리가 여성들을 보고 있다는 것을 또한 기억해야만합니다. 구약문화시대를 살았던 여성들에게는 그런 편리함이나 유리함이 없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이 유목사회나 농경사회에 살았기 때문에 남성은 육체적인 유리함으로 리더십의 정점을 차지했습니다.일반적으로 체력의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지만 영적 요인 역시 유대여성의 지위에 부담을 주었습니다. 심지어는 신약에서도 인류에게 죄가 침투한 그 입구에서 여성이 아담과 함께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례를 상기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의존하라고 말했습니다(고전 11:11-12). 그리고 남편들과 아내들은 서로 존경할 책임이 있으며 서로의 필요에 복종하라고 했습니다(엡 5:21-25).
그러나 바울 역시 영적인 직위와 질서에 대해서 쓰면서 창조와 타락을 비교문화적으로 연결했습니다.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딤전 2:12-15).

또한 하나님 안에서의 관계에 대해서도 썼습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전 11:3)

그러므로 여성의 지위 문제는 신약과는 연관이 없는 구약의 문제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꼭 유의해야할 것은 구약에서 시작되어 그리스도의 영성과 본을 받아 성취된 계시의 흐름은 하나님의 관점에서의 여성과 동시대의 사회질서나 문화의 관점에서의 여성이 다르다고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화와 우리의 사회에는 하늘나라에 가서만 해결될 수 있는 불공평한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영원히 받아주시냐는 실질적인 문제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3:28).


하나님께 정직해야


듀크 대학의 신학 교수인 윌리암 윌리몬 박사는 졸업예배에서 민수기 13-14장 말씀을 놓고 예상대로 격려를 하며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이스라엘 사람들의 부족한 믿음으로 인해 분노한 하나님이 그들을 멸망시키겠다고 위협했다가 자비를 간청하는 모세의 기도를 듣고 나중에 마음을 바꾼 하나님에게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윌리몬 교수는 “갑자기 나는 성공에 이르는 긍정적인 사고의 힘을 전하는 나의 소박하고 관습적인 짧은 설교를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는 크고 가시투성이인 의인화된, 거의 우리와 같은 모습을 하신 하나님에 대해 설교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을 잡고 그 분이 하신 약속들을 지킬 책임이 있음을 기도 중에 이론적으로 설득했던 모세 같은 인간을 필요로 하는, 감정을 가지고 계시며, 그 분이 사랑하시는 백성들 때문에 마음 아파할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의 앞에 있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크리스천 투데이, 28쪽, 1996. 10. 28).
윌리몬 교수는 아주 중요한 발견을 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우리 생각과 감정에 관여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이나 불안감을 느끼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대항하여 압력을 가하는 우리 의지의 열기를 느끼고 싶어 했습니다. 그 분은 어떤 일이 나쁜지, 아주 나쁜지, 고칠 수 없이 나쁜지 감지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잘못이 어느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찾을 때까지 우리가 계속 질문하기를 원했습니다.
이 하나님이 하신 많은 일들은 우리의 감정에 충격을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행위의 순수성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깊이 뉘우치고 겸손하게 만드는 경각심으로 인도하기 위해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자비를 찾을 수 있습니다. 좋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정직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전체 7

  • 2019-08-12 23:04
    여호와의 당위성에 대하여 장문으로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지만 전제 조건이 잘못되었을 지적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먼저 예수님 말씀을 인용하겠습니다. "아버지는 악인이나 선인에게도 똑같이 햇빛과 비를 주신다." 너무도 당연한 진리입니다. 동양고전에도 "천지불인"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두가지 말은 창조주가 인간사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윗글의 모순은 여호와를 창조주라 설정해 놓고 전개되는 일방적인 주장일뿐입니다. 물론 글을 쓰시는 입장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전제조건이라 생각하지만 질문을 한 학생의 입장에서 보면 어처구니 없는 메아리일뿐입니다. 예수가 이땅에 오신 이유도 여학생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함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에 존재하는 영적인 존재들이 하나님인지 아닌지를 인간은 구분할 능력이 없습니다. 영적인 권능과 공포로 또는 인간의 약한 감정을 파고드는 유혹으로 다가올때 인간은 그 존재를 섬길수 밖에 없었을겁니다. 오늘 여호와가 깊은 뜻을 가진 전능한 하나님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여호와 스스로 한 말처럼 그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이스라엘의 신이며 질투하는 속성을 가진 신이라 정의 할 수 있습니다. 질투는 자신보다 우월한 존재에 대한 열등감으로도 표현 될수 있는바 여호와신은 스스로 하나님이 아님을 자백하고 있슴을 알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에게 이름이 있다는것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뜻일겁니다. 이름이라는것이 사물의 본질을 나타낸다고 볼때 세상의 이치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데 하나님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 했다는것은 있을수 없는 일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수많은 사건들은 여호와가 하나님이 아니기ㄸ깨문에 일어 나는 사건이라고 보면 정확 합니다. 여호와는 영적 피조물로서 이스라엘 민족신입니다.

    • 2019-11-26 16:36
      아버지가 자녀에게 (악인이든 선인이든) 똑같이 햇빛과 비를 주신다는 것이, 어떻게 아버지가 그들의 삶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해석이 될 수 있지요? 사랑하기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좋은 길로 인도하려고 하고 죽음에 빠질 때에 구하려고 하는 것이 아버지 아닌가요?
      역사에 존재하는 영적인 존재들이 하나님인지 아닌지를 인간은 구분할 능력이 없다는 것도 개인의 의견이라 생각됩니다. 인류전체가 동일하게 그런 능력이 없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나요?
      하나님과 여호와를 분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신으로 표현하신 것을 보니 다신교를 믿으시는 분이신 것 같습니다. 그것으로 인한 오해라고 생각되네요.

      • 2020-01-05 00:09
        위에 목사님도 신들 중에 신이라는 표현을 하신걸로 보아 신이 여럿이지만 최고신은 유일하다는 생각을 갖고 계신 거 같습니다 다신교가 모든 신을 숭배한다는 의미는 아니잖아요

        • 2020-01-06 18:40
          비유를 그렇게 한거지 다른 신이 있다 믿는 목사가 어디있어요?

  • 2017-05-29 15:43
    귀한 가르치심 감사합니다. 그런데 첫번째 질문 후 중독성 문화 제목이 이해가 안됩니다. 중동의 문화, 중동 성문화 이런것이 아닌지요

  • 2019-04-10 20:06
    耳懸鈴鼻懸鈴

  • 2019-04-29 07:28
    윗분 잘 표현했네요 ~. 귀에걸면 귀걸이 코에걸면 코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