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와 정의

작성자
한국오늘의양식사
작성일
2021-06-01 19:05
조회
1249

자비가 정의와 마주칠 때


말을 해야 할까, 아니면 그냥 불평만 할까? 맨해튼의 한 엘리트 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이 한때 가까웠던 친구의 괴롭힘에 어떻게 대응할지 고민했습니다. 그 친구는 그의 면전에서 자주 험악한 인종 차별적인 이름으로 그를 부르곤 했습니다. 다른 한 학생은 그의 사진 밑에 “원숭이”라고 쓴 것을 학교에 퍼뜨렸습니다.

그는 학교 공부에 집중하려고 애쓰면서 이 굴욕을 무시하기로 작정하고 처벌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정의 때문에 퇴학당한 학생들이 적개심을 품게 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이런 일이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한 선생님이 학교를 설득하여 정의를 회복하기 위한 획기적인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그 주된 목표는 원상복구였습니다. 진정, 훼손된 것을 다시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대화의 문을 열고 그 학생과 그를 괴롭힌 학생이 솔직히 이야기를 주고받는 가운데, 그의 옛 친구는 마침내 사과했고, 따뜻했던 그들의 우정이 기분 좋게 회복되었습니다.

이 정의가 어떻게 이런 치유를 불러왔을까요? 바로 자비입니다. 그것은 성경에 나오는 정말 놀라운 선물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한 손으로 정의를 행하실 때 종종 다른 한 손으로는 자비를 베푸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이 훌륭한 조합을 이루셨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단번에” 자기 몸을 드리심으로(히브리서 10:10) 정의의 하나님을 만족시키신 동시에 우리에게는 주님의 사랑의 자비를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죄성이 가득한 이스라엘 민족도 이와 비슷한 형벌의 유예를 받았습니다. 일 년 된 송아지나 “강물 같은 기름”의 번제물로 무의미한 제사를 드리려고 꾀하는 그들에게 미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6-8).

우리는 정의를 열심히 추구하는 만큼 자비도 그렇게 베풀고 있습니까? 그것은 베풀 만한 가치가 있는 성스러운 선물입니다.

페트리샤 레이본, 오늘의 양식 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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