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48호)

작성자
한국오늘의양식사
작성일
2019-11-05 12:40
조회
171

차 례


발간사 / 김상복 목사

서문 / 마크 스트라우스

  1. 복음서 소개

  2. 마태복음 읽기

  3. 마가복음 읽기

  4. 누가복음 읽기

  5. 요한복음 읽기


발간사


구약은 구원자 메시아가 오신다는 예언이고, 신약은 그 분이 오셔서 구원의 역사를 마치고 천국의 아버지께로 돌아 가셨다가 인류의 마지막 심판을 위해 다시 오실 것 이란 내용입니다. 사복음서는 오신 예수님을 네 개의 카메라가 조금씩 다른 앵글에서 동일한 주님을 찍은 내용입니다. 인류의 구원자 예수님을 알려주어 누구나 그 분을 믿음으로 죄 사함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려는 궁극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사복음서의 목적과 특징을 알면 예수님을 더 이해하게 됩니다. 복음서를 알고 나면 남은 성경들이 보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의 첫 발걸음입니다. 모두 읽으시고 도움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발행인 김상복 목사


서문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들은 가장 좋은 소식은 무엇이었나? 아마도 늘 입학을 꿈꾸던 대학에서 장학금을 주겠다는 편지일 수도 있고, 자녀로부터 손주가 태어났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전화일 수도 있다. 이러한 것은 정말로 반가운 소식이다. 혹은 의사로부터 치료가 잘되어 암이 다 없어졌다고 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정말로 좋은 뉴스이다.

신약성경의 처음 네 권인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은 복음서라고 하는데, 이때 ‘복음’이라는 말은 ‘좋은 소식’이라는 뜻이다. 이들을 복음서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들 네 권의 책이 이제까지 들어보지 못한 엄청난 소식을 전하고 있기 때문인데, 곧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라고 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인류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다고 하는 것이다.

마크 스트라우스 Mark Strauss


복음서 소개


우리 모두는 다 좋은 소식을 듣기 원한다. 때때로 좋은 소식은 괜찮은 상황을 더 좋게 만들 수도 있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할 수도 있으며, 좋지 않은 상황을 바꿀 수도 있다. 또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는 곳에 희망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복음은 좋은 소식인데 절실히 원하는 세상에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복음은 바로 하나님이 그의 세상을 구하셨다는 좋은 소식이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죄를 범한 이후 인간은 하나님과 멀어졌고 창조주로부터 분리되었다. 그러나 은혜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실행하셨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 계획에 대해서 말했고, 세상에 구원과 회복을 가져다 줄 구원자 즉 메시아가 올 것을 예언하였다. 이 구원을 설명할 때 이 선지자들이 자주 사용한 말이 바로 ‘좋은 소식’이요 ‘복음’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표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표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이사야 52:7)
메시아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기름 부은 자’를 뜻하는데 그리스어로는 ‘그리스도’로 번역된다. 이 단어는 유대교에서는
그의 백성들을 구원할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라는 의미로 쓰인다.
좋은 소식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하기 위해서 오셨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길을 여실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치기를 시작하셨을 때 이사야서에서 이 말을 가져 오셨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마가복음1:15)라는 것이었다.

우리들의 죄 때문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그가 완성한 구원을 세상에 알리도록 그의 제자들을 보내셨다. 그의 제자들이 이 메시지를 설명한 말이 바로 ‘좋은 소식/복음’이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우리 복음(유앙겔리온)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데살로니가전서 1:5)라고 썼다.

복음이 구원에 대해 선포한 말씀이라는 사실은 이 네 복음서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복음서는 기독교의 시작에 관한 케케묵은 역사서가 아니다. 그것은 또한 예수에 대한 전기도 아니다. 복음서는 구원을 선포하는 글로 쓰인(그리고 누가복음에서는 조사된) 기록이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20:30-31)
고대 사회에서는 글로 쓰인 기록도 있지만 새로운 소식과 정보는 주로 입에서 입을 통한 구전으로 전해졌다.
요한은 사람들이 단순히 예수에 관한 사실을 알게 하려고 쓴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고 반응하게 하려고 기록하였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책이나 짧은 글을 읽을 때 생기는 첫 번째 질문은 ‘내가 무엇을 읽고 있는가?’이다. 우리가 흔히 장르라고 부르는 글의 종류에 따라서 읽는 방법이 달라진다. 어느 하루 동안에 읽게 되는 읽을거리들을 생각해보자. 아침에는 신문을 집어 들거나 혹은 인터넷의 뉴스사이트에 접속하여 그날의 사건들을 읽을 것이다. 우리는 이 기사가 사실이고 역사적으로 정확할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날 늦게 슈퍼마켓에 가서 계산대 앞에 서서 ‘외계인 뉴욕시 침범’이라는 타블로이드신문의 기사를 보게 되면 놀라지 않는데, 이는 그 기사가 사람의 주의를 끌려는(무언가를 사게 하려는) 장난 기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집에 가서 우편함을 열었는데 한 편지에 큰 활자로 ‘백만 불 당첨 축하!’라고 쓰여 있다면 이것도 역시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무엇을 사게 하려고 사실을 과장하는 ‘쓰레기’메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전기요금 고지서는 진지하게 받아들이는데 이는 만약 무시하면 전기가 끊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루 종일 끊임없이 글의 유형을 확인하고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결정한다.

그렇다면 복음서는 어떤 글인가? 복음서를 읽을 때 우리는 무엇을 찾아야 하는가? 복음서의 세 가지 특징이 이를 잘 읽고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복음서는 역사이며, 이야기 책이며, 신학이다.
현재 우리는 대략 5,500개의 완전한 혹은 부분적인 신약성경의 필사본을 가지고 있다. 그 중 한 완전한 필사본은 성경이 원래 쓰인
이후 최대 225년이 경과한 것이다. 가장 오래된 신약성서의 필사본은 AD 114년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이는 가장 오래된 필사본과
원본 간에는 최대 50년간의 역사적인 간격이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최대라고 한 이유는 신약성경 필사본 연구센터
Center for the Study of New Testament Manuscripts에서 일하는 Dan Wallace 박사와 그 연구 팀이 발견한 마가복음의 일부 기록이
적어도 1세기 이전 것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서는 우선 역사적인 기록이다. 이 말은 복음서는 구체적인 장소와 시간을 배경으로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을 기록하려 했다는 것이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전설이나 신화나 우화를 전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기록한 사건들을 실제의 일로 간주했다. 특별히 누가는 이 점을 그의 복음서 서두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복음서에 기록된 사건들을 주의 깊게 조사하였고 목격자의 증언을 구하였기 때문에 독자들은 전해들은 사건의 확실성을 의심할 수 없다고 하였다. 요한도 또한 목격자로서 증언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는데 “이 일들을 증언한 제자가 이 사

람이라 …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요한복음 21:24)라고 기록하였다.

이 이슈가 중요한 이유는 기독교의 진리는 이들 사건의 사실성 여부에 따라 부침을 겪었기 때문이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서 놀랄만한 주장을 펴셨다. 그는 자신을 메시야요 세상의 구원자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세상 죄에 대한 대가라고 규정하였다. 가장 중요한 복음서의 클라이맥스는 예수님의 부활인데 이는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을 확증하는 사건이다. 만약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다시 사시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가짜였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고린도전서 15:14)임이 분명하다. 복음서는 실제 일어난 사건을 기록한 역사적 산물이라는 것이 복음서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이다.

그런데 복음서는 특별한 역사책이다. 역사에 있었던 이야기들이며, 스토리로 전해 듣는 역사라 할 수 있다. 모든 스토리에는 줄거리와 등장인물과 배경이 있다. 스토리에는 줄거리가 있고 이에 따라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보통 갈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해결하여야 할 문제가 발생한다. 스토리는 클라이맥스에 이르고 해결책이 찾아진다. 이것은 복음서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예수님께서 무대에 등장하시고 자신에 대해 증거하신다. 사탄과 귀신과 종교지도자, 그리고 마침내는 로마 당국자의 도전을 받고 갈등이 고조된다. 네 복음서 모두는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사탄과 종교지도자를 적대자로 하는 구성을 보인다. 네 복음서 모두 이야기 전개의 정점은 십자가의 죽음이며 부활에서 해결책이 찾아진다.

네 복음서는 예수님의 동일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저자들은 각자의 독특한 방식으로, 그리고 독특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즉 등장인물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묘사하기도 하고 특별한 배경과 주제를 강조하기도 한다. 각 복음서가 어떻게 시작되는 지를 보면, 마태복음은 족보로 시작하면서 예수님이 왕실가문의 적자임을 확인시킨다. 마가복음은 세례요한의 설교와 예수님의 사역으로 시작한다. 누가복음은 역사가로서의 자질을 보여주면서 보통의 문학작품처럼 시작한다. 요한복음은 상당히 신학적인 서언으로 시작하여 예수님은 태초부터 존재하는 하나님의 말씀인데 우리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위하여 인간이 되신 것으로 설명한다. 각 복음서는 그 저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주제로 시작된다.
성령은 예수님께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함께 있을 것이라 약속하신 것이다(요한복음 14:16). 성령은 성경 저자들에게
영감을 부어주신분이다(디모데전서 3:16, 베드로후서 1:21 참조).
성령이 우리에게 하나가 아닌 네 개의 복음서를 주셨다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각 복음서 저자는 서로 비슷해 보이지만 각각의 고유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런데 교회역사에서 복음서들을 통합해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려고 하는 바람직스럽지 않은 경향이 있었다. 물론 이 시도는 모든 이야기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말하려고 하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성령은 삼위일체의 세 번째 하나님이다. 있었다. 이 시도가 위험한 것은 네 복음서를 오려내고 서로 붙여서 하나로 만들 때 각 복음서의 고유한 관점을 잃어버리거나 왜곡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이 네 개의 걸작들을 묶어서 하나로 만든다면 각 복음서가 교회에 주는 성령의 고유한 메시지를 잃게 될 것이다. 따라서 각각의 복음서의 문학적, 역사적 사실성과 고유성을 인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바로 이 관점에서 복음서들을 설명하는 세 번째 핵심 단어가 나온다. 복음서는 역사이고 이야기 책일 뿐 아니라 신학이다. 이 말은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세상의 구원자라고 철저하게 믿은 사람들에 의해 믿음의 영감으로 쓰인 문서라는 뜻이다. 이 점은 요한이 요한복음을 쓴 목적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요”(요한복음 20:30-31)라는 말 속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또한 누가도 독자들에게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누가복음 1:4) 하기를 원했다. 마태와 마가, 누가와 요한 모두는 그들이 말하는 것이 모두 참인 것을 굳게 믿었고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을 얻기를 원했다.


한 예수님의 네 가지 자화상


각 복음서가 각각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설명으로 복음서가 하나가 아니고 네 개인 이유를 알게 된다. 성령은 교회가 예수님의 다면적인 모습을 보게 되기를 원했다.

영화예술에 있어서 가장 놀라운 경험은 IMAX 영화이다. 여러 개의 카메라가 관객들에게 360도의 영상을 만들어 보여준다. 카메라가 도시와 산과 바다를 가로질러 보여주는 광대한 영상은 숨을 멎게 한다. 네 개의 복음서는 예수님의 모습을 360도로 기가 막히게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이시며 무엇을 이루셨는지를 완전하게 알 수 있다. 다음 네 개의 장에서 우리는 각각의 복음서가 보여주는 예수님의 독특한 모습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마태복음 읽기: 유대인의 왕 구세주의 복음서